6·25전쟁 참전 장병 후손들이 한국을 방문해 만날 기회가 있었다. 유엔군의 국적만큼이나 국적과 연령층도 다양했고, 젊은 학생도 많았다. 참전 장병의 증손도 있다고 한다.
6·25전쟁의 세계사적 의미, 20세기에 발생한 세계대전과 냉전, 21세기에 다가올 전쟁의 위협과 평화를 위한 노력 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질문과 토론이 이어졌는데, 좀 놀랐다. 학생들의 생각과 토론 수준이 의외로 높았다. 더 깊고 날카로운 질문을 하고 싶은 학생들도 있었던 것 같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질문의 수위를 낮추거나 배려를 많이 해주었던 것 같다.
젊은 학생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신선하고 새롭다. 처음 듣는 이야기여서가 아니라 우리도 그때 똑같은 고민을 했었고 그런 고민들이 세계의 현실과 만나면서 겪었던 여정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게 왜 새롭냐고? 진부하고 뻔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다. 인간의 욕망은 바뀌지 않고 인류는 같은 잘못과 실수를 반복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가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지는 않는다. 50년이 된 도로라고 해도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는 바뀐다. 도로에서 벌어지는 문제와 갈등은 같다고 해도 사람은 바뀌고, 그들은 또 그들 나름의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구세대가 판별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엮어낼 결론이 아니라 문제에 맞서려는 선한 의지와 용기이다.
세계 각국에서 온 학생들인 만큼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면 국가 간의 문제, 대륙 간의 갈등, 빈부격차, 슈퍼파워의 역할 또는 지배에 대해 논쟁적인 대화를 들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분명 그런 문제의식들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아는 것과 대화의 차이는 무엇일까?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자세의 유무이다. 세상을 분열시키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악의 영역을 설정하는 것이다. 이상주의자는 대화로 풀지 못할 일이 없다고 한다. 아니다. 대화 이전에 세상을 선악으로 보고, 선과 악을 단순화하는 마음가짐부터 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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