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주 52시간제를 도입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주 52시간제는 박근혜 정부와 19대 국회가 처음 추진했고, 문재인 정부와 20대 국회가 이를 이어 받아 근로기준법을 개정하면서 시행됐다.
2015년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노동 공공 교육 금융 등 4대 개혁을 천명하고 대대적인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 가운데 노동개혁은 당시 정부가 가장 집중했던 분야였다. 노동개혁 논의는 노사정위원회(현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사회적 대타협’을 추진하며 주도했고, 네덜란드의 ‘바세나르 협약’을 대타협의 모델로 삼았다.
1970년대 극심한 실업난을 겪었던 네덜란드는 1982년 ‘바세나르 협약’을 통해 위기를 극복했다. 노동계가 임금 동결을 받아들이는 대신 경영계는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 등을 약속하고, 정부는 사회안전망을 두텁게 했다. 네덜란드의 15∼64세 고용률은 2019년 기준 78.2%에 달한다. 노사정(勞使政)이 한 발씩 양보해 노동개혁에 성공한 결과다.
노사정위도 바세나르 협약과 비슷한 ‘빅딜’을 추진했다. 주 52시간으로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통상임금과 실업급여를 확대하는 대신 저(低)성과자 해고와 임금피크제 도입, 비정규직 고용기간 연장과 파견 확대 등을 추진했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사회안전망을 두텁게 하되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대하는 ‘유연안정성 모델’이었다. 협상은 상당한 진통을 겪었지만 한국노총과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서로 양보하면서 2015년 9월 15일 협약문이 완성됐다. 1998년 외환위기 극복 협약 이후 17년 만에 나온 사회적 대타협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협약을 시행하려면 국회가 노동법을 개정해야 했다. 야당이었던 새정치민주연합은 민노총이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9·15협약’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정부는 입법을 일단 미룬 채 지침만으로 시행이 가능한 저성과자 해고와 임금피크제부터 추진했다. 이는 노동계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고 한국노총의 협약 파기로 이어졌다.
박근혜 정부와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은 대타협 이후 야당과 협치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했다. 2016년 총선에서 압승하면 노동법을 손쉽게 개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총선에선 예상을 뒤엎고 더불어민주당이 1당이 됐다. 그리고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면서 개혁의 동력이 상실됐다. ‘한국형 노동개혁’이라 불리며 세계가 주목했던 9·15협약은 휴지 조각이 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5월 16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연금 노동 교육개혁은 지금 추진되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할 것”이라며 “정부와 국회가 초당적으로 협력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이 발언을 듣고 2015∼2016년 노동개혁 국면의 데자뷔를 느꼈다. 다음 총선은 아직 1년 9개월이나 남았고 국민의힘 의석은 115석에 불과하다. 윤 대통령과 여당이 적극 협치에 나서지 않는다면 ‘초당적 협력’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2015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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