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배가 좀 나왔다”, “머리는 얼마나 빠졌나 보자”, “내가 해보니 운동이 최고다. 아무리 바빠도 시간 내서 운동해라”.
보통은 이런 부모님의 이야기를 잔소리쯤으로 치부하고 흘려듣곤 한다.
하지만 이는 과학적 측면에서 새겨들어야 할 말들이다.》
부모님의 ‘금쪽 처방’
몸이 아플 때 의사도 아닌 부모님이 효과적인 처방을 줄 때가 많다. 반신반의로 따라한 민간요법이 놀라운 약효를 내기도 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바로 ‘가족력’ 때문이다.
부모님은 나와 유전자의 절반을 공유하는 사람이다. 나의 부모님도 내가 앓았던 질병에 걸렸을 확률이 일반인보다 매우 높다는 뜻이다. 부모님의 처방이 지닌 힘은 나와 같은 경험을 한 데서 나온다. 부모님이 축적해온 건강에 관한 지식은 자녀에게 큰 지혜가 된다.
지인 A와 B는 이런 가족력을 염두에 둔 생활습관으로 건강을 지키고 있다. 우선 A의 외조부는 젊은 나이에 폐질환으로 사망했다. 옷 가게를 운영하던 A의 어머니도 40대 초반 실내 먼지를 많이 마신 탓에 급성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하지만 그녀는 에어로빅으로 폐질환을 이겨냈고, 이후에도 꾸준히 유산소 운동을 하며 지금까지 옷가게를 운영할 정도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외조부와 어머니의 투병을 지켜본 A는 담배는 한 번도 입에 대지 않고 틈틈이 운동을 하면서 폐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20대 후반에 위암으로 아버지를 잃은 B 역시 평소 위 관리에 각별하다. 평소 짠 음식은 입에 대지 않고 위암의 주요 원인인 헬리코박터 제균 치료를 받았다. 그래서인지 위 내시경 결과는 늘 완벽에 가깝다.
반면 40대 초반의 C는 몇 년 전 일하던 중 갑자기 쓰러져 결국 사망했다. 평소 비만과 고혈압을 앓았던 그의 사망 원인은 뇌출혈이었다. 그의 어머니도 과거 뇌출혈로 입원한 적이 있지만 C는 고혈압을 관리하지 않았다. FTO 유전자는 비만을 유발하는 유전자로 알려져 있고, 비만은 심혈관질환의 주요 원인 중 하나다. 비만은 운동과 식습관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만큼, 그가 가족력을 주의 깊게 살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가족의 병력 더 꼼꼼히 따져야
유전학에서는 혈연관계를 1도, 2도, 3도 관계 등으로 구분한다. 1도 관계는 유전체의 50% 정도를 공유한다.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 관계 등이 1도에 해당한다. 2도 관계에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자 손녀 관계, 삼촌, 고모, 그리고 배다른 형제 등이 속한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25%의 유전체를 공유한다. 사촌 간은 3도 관계로 유전체 12.5% 정도를 공유한다.
이 공식에 비춰 보면 대략의 발병 위험을 예측할 수 있다. 심혈관 질환을 가진 1도 관계 친척이 한 명 있다면 같은 질병에 걸릴 확률이 2배로 증가한다. 1도 관계 친척 중 둘 이상 심장병이 있고 53세 이하에서 발병했다면 심장병 발병 위험도는 5배가 된다. 대장암, 전립샘암, 유방암, 제2형 당뇨병을 앓는 1도 관계 친척이 한 명 있다면 같은 질병의 발병 위험은 2∼3배 정도 증가한다.
가족력은 병의 예방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미국 영화배우 앤젤리나 졸리의 어머니는 난소암으로 사망하고, 이모는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2015년 유전자 검사 결과 유방암, 난소암 위험이 큰 브라카(BRCA1) 유전자 돌연변이가 있음을 발견한 그는 양측 유방을 떼어내는 예방적 절제술을 받았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유방암 가족력이 있는 여성에 대한 BRCA1, BRCA2 유전자 검사를 권장하고 있다. 반면 가족력이 없는 경우엔 BRCA 유전자 검사를 건강검진 항목으로 포함하는 것은 제한한다. BRCA 유전자 변이가 있는 경우는 200분의 1에서 1000분의 1로 드물어서 비용 면에서 효과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유전자 검사로 미래 질병 예측이 가능한 시대가 열렸다. 서로 다른 두 사람 간 32억 개의 염기서열을 모두 비교하면 0.5% 정도가 다르다. 사람마다 선천적으로 염기서열이 다른 것을 다형성(polymorphisms)이라고 한다.
수명, 유전자 영향이 25%
많은 연구에서 유전자 다형성으로 여러 질병 및 인간의 표현형을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술을 마시면 얼굴이 빨개지고, 어떤 사람은 술을 많이 마셔도 잘 취하지 않는다. 동일한 약물이라도 효과가 좋은 사람이 있고, 효과가 없거나 부작용이 심한 사람도 있다.
수명 역시 유전자에 25% 정도 영향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수에 관여하는 유전자로는 APOE 유전자, 시르투인(sirtuin) 유전자 등이 있다. APOE 유전자는 수명 단축, 심혈관 질환, 알츠하이머병의 위험과 높은 관련성이 있다. 장수인과 일반인을 비교한 연구에 따르면 APOE 유전자의 특정 변이가 있는 사람은 변이가 없는 사람보다 장수할 가능성이 1.47배 높다.
시르투인 유전자는 활성화될 경우 수명이 길어지는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한 연구에서 적포도주에 있는 레스베라트롤이라는 물질이 시르투인 유전자를 활성화시키는 것으로 확인됐다. 저열량식과 운동이 시르투인 유전자를 활성화시킨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유전자가 절대적으로 장수 여부를 결정짓는 건 아니다. 환경적 요인도 75%나 영향을 미친다. 부모님과의 대화로 나의 질병 가족력을 알고, 주어진 유전체와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는 게 중요하다. 즉, 유전체와 환경의 상호작용 원리를 알고 실천해야 한다. 예컨대 폐질환에 취약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면 흡연, 미세먼지 등 유해 환경을 멀리한다. 비만 유전자 또는 APOE 유전자 변이가 있다면 특히 운동과 식습관 개선에 힘쓴다.
100세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30년 우리나라 남녀의 평균 수명은 각각 83세, 88세를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100세에 근접할 때까지 사는 인원도 대폭 늘어날 것이다. 수명이 길어진 만큼 더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필자는 평소 십계명 가운데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말에 관심이 있다. 유전학적 지식을 여기에 넣는다면 ‘부모님을 공경(잘 이해)하면 장수한다’고 변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식의 건강을 걱정하며 부모님이 하는 잔소리를 허투루 흘려들을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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