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중순 미국 디트로이트 공항에 델타항공 9888편 비행기가 도착했다. 영국 런던발 여객기에는 승객이 한 명도 타고 있지 않았다. 대신 여행용 트렁크 1000개가 빼곡히 들어찼다. 과부하가 걸린 런던 히스로 공항의 수하물 시스템 결함으로 주인을 찾지 못한 여행가방들이었다. 전례 없는 ‘수하물 운송 작전’을 놓고 델타 측은 “독창적인 아이디어”라고 했다. 실상은 공항에 나뒹구는 분실 수하물 처리를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여름 휴가철이 시작되면서 해외 주요 공항들이 대혼란에 빠졌다. 히스로 공항에서는 인력 부족과 관제 시스템 오류 등 때문에 하루 최대 4000명의 승객이 제때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네덜란드와 독일 공항에서는 길게 늘어선 승객 줄이 바깥 주차장까지 이어지면서 텐트가 등장했다. 프랑스 샤를드골 공항에서는 7월 첫 주말에만 가방 1500개가 분실됐다. 미국에서도 독립기념일 연휴에 하루 600편이 결항되고 4300편의 운항이 지연됐다.
▷“여긴 완전히 지옥이야!” SNS에는 혼잡한 터미널에 늘어선 수백 m의 줄과 켜켜이 쌓인 미처리 수하물 사진이 쏟아진다. 난장판이 된 공항은 ‘에어마겟돈(airmageddon)’으로 불린다. 공항(airport)과 종말의 대전쟁(armageddon)을 합친 조어로 외신들이 쓰기 시작했다. 히스로 공항은 결국 “하루 10만 명 이상은 수용이 어렵다”며 항공사들에 티켓 판매 중단을 요구했다. 36시간 내에 응하지 않으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며 엄포를 놨다. 그러나 일부 항공사가 ‘용납할 수 없는 불합리한 요구’라고 반발하면서 법정 싸움까지 벌어질 판이다.
▷에어마겟돈은 2년 반 동안 코로나19 팬데믹이 이어지면서 공항 및 항공사 인력이 줄어든 게 주요 원인이다. 반면 방역조치 종료 후 ‘보복 여행’ 수요는 폭발했다. 현재 항공업계 부족 인력은 7200명으로 추산된다. 환승이 많은 주요 거점 공항들이 직면한 연쇄적 피해는 심각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하늘길에 제한이 생기면서 병목현상이 심화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공항들이 낡은 시스템과 비효율성 책임을 항공사에 떠넘긴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해외 공항 대란은 초가을까지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히스로 공항이 항공권 판매 제한을 요구한 시기가 9월 11일까지다. 항공사들은 증원은커녕 닥쳐오는 파업 시즌에 기존 인력마저 더 줄어들 상황이다. 그래도 여행자들은 “최소 5시간 전에는 도착해야 한다”는 정보를 교환하며 공항에 몰려오고 있다. 코로나 변이 바이러스의 공격적인 확산세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코로나 재확산에 물가와 환율 상승까지 겹치면서 해외여행에 신중해진 한국인에게는 낯설고도 불안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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