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생’밖에 길 없는 초유의 위기
한쪽이 녹아웃 될 때까지 싸우는 ‘라스트 맨 스탠딩’ 경기 닮은 꼴
고통 감내 없이는 피투성이 패자 될 것
전례도, 출구도, 우군도 안 보이는 경제위기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경제 지표와 병증은 일단 40여 년 전을 가리킨다. 미국의 전년 동월 대비 6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은 41년 만에 최고치를 찍었고,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가 동시에 진행되는 ‘스태그플레이션의 유령’이 40년 만에 기지개를 켜고 있다.
1970년대 중반∼1980년대 초반 스태그플레이션 위기는 각국의 방만한 재정 운용으로 물가가 상승 행진을 하는 가운데 중동 전쟁으로 인한 2번의 오일쇼크가 덮친 것이 원인이었다. 각국이 코로나19 팬데믹 대응을 위해 막대한 재정 지원 보따리를 풀어 놓은 와중에, 우크라이나 전쟁발 에너지·식량 인플레이션 복병을 만나 촉발된 이번 위기와 닮은 점이 있다.
혹자는 유가가 10배가량 뛴 1970년대 위기와, 유가가 2배 오른 지금의 위기를 비교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위기에는 훨씬 복잡 미묘한 지정학적 위기가 이중삼중으로 얽혀 있어서 유가 오름폭이 작다고 안도할 상황이 아니다.
철의 장막이 쳐져 있던 당시 중국·소련은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고려 요인이 아니었고 인도 브라질 등 신흥국도 존재감이 없었다.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 등 G7만으로도 전 세계를 하나로 아우르는 위기대응 리더십이 작동했다. 이때의 경험이 밑천이 돼서 G20이 탄생했고, G20은 1990년대 후반 아시아 금융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돌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지금의 G20은 회원국 간 갈등으로 빈껍데기만 남았다. G7도 러시아 제재의 예기치 않은 역풍을 만나 각자도생에 급급한 처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치솟는 물가에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면서 11월 중간선거가 위태롭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6월 하원 선거에서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영원한 제조업 강국’ 독일은 31년 만에 처음으로 월간 무역적자를 냈다. 독일 국민들은 올겨울 에너지난에 대비해 땔감을 사 모으는 중이다.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는 사임 위기에 몰려 있다. 상습적인 거짓말이 주된 원인이지만 고물가와 증세로 공격을 받은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이미 사임을 발표했다.
든든한 내수시장이 있는 미국 일본 유럽연합(EU)과는 달리, 한국은 우크라이나발 인플레이션 말고도 큰 우환거리가 하나 더 있다. 빈약한 내수시장과 자원시장의 빈틈을 메워준 중국이다. 30년간 한국경제의 디딤돌 역할을 해온 대중무역은 5월부터 흑자에서 적자로 돌아섰다. 미중 간 공급망 전쟁이 격화하면 희토류를 독점하고 있는 중국의 자원무기화 ‘칼끝’이 언제 한국을 향할지 모른다. 전기차와 디스플레이 등 첨단제품의 필수 재료인 희토류의 공급 중단은 요소수 품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경제적 대재앙을 뜻한다.
프로레슬링에는 ‘라스트 맨 스탠딩(Last man standing)’이라는 경기방식이 있다. 어느 한쪽이 ‘KO’ 돼서 일어설 수 없을 때까지 싸우는 가혹한 룰이다. 경제에도 곧잘 쓰이는 비유인데, 지금 한국을 비롯한 세계경제가 맞닥뜨린 위기가 딱 이런 형국이다.
1979년 미국 연준 의장으로 취임한 폴 볼커는 당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연 12% 수준이던 정책금리를 3개월 만에 22%까지 끌어올렸다. 볼커의 전례를 보면 올 5월 연준이 보여준 빅스텝(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은 ‘소박한 시작’일 가능성이 크다. 연준이 본격적인 금리인상 행진을 시작하면 한국은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다. 물론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따른다. 한국의 가계부채와 기업부채는 모두 연간 GDP 규모를 웃돌 정도로 위험수역에 들어가 있다. 금리 인상 과정에서 ‘빚투 가계’와 ‘한계 기업’들은 피가 튀고 살이 튈 것이다. 그래도 한국은 연준을 쫓아가지 않을 수 없다. 한미 간 금리 차가 크게 벌어지면 스리랑카 꼴이 나지 말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잡힐 때까지 무한인내를 발휘하지 못하면 한국은 피투성이 패자가 될 것이다.
제한시간도 없는 ‘라스트 맨 스탠딩’ 매치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하다. 그런데 위기 극복에 앞장서야 할 대통령과 여당, 입법으로 뒤를 떠받쳐야 할 거대 야당은 언제까지 링 밖의 구경꾼으로 남아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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