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31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는 세계 50개 오케스트라 단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고잉홈 프로젝트’가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을 지휘자 없이 연주한다. 리듬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곡이다. 지휘자의 손과 몸짓을 보지 않고도 잘 맞출 수 있을까.
오케스트라에 처음부터 지휘자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심지어 베토벤의 교향곡도 대개는 악단 앞쪽의 건반악기(하프시코드나 피아노) 앞에 앉은 연주자가 화음을 넣으면서 고개를 까딱이는 식으로 합주를 이끌었다.
작곡가 슈만은 지휘자이자 역시 작곡가였던 멘델스존과 마음이 잘 맞는 동지였다. 그런 슈만도 이런 글을 남겼다. “좋은 오케스트라는 곡이 시작할 때와 템포가 바뀔 때를 제외하면 특별히 지휘가 필요하지 않다.”
20세기까지 생존한 베르디의 오페라 대부분도 그의 생전에 지휘자 없이 공연되었다고 지휘자 존 마우체리는 책 ‘지휘의 발견’에서 설명한다. 이때 악단을 통솔하는 역할은 흔히 제1바이올린의 리더(악장)가 맡았다. 악장은 종종 합주에서 빠진 상태로 활을 이용해 가수나 단원들에게 신호를 주었다.
19세기 중반 오케스트라의 규모가 커지고 곡 해석의 다양성이 강조되면서 점차 지휘자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그렇지만 20세기에도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가 있었다. 1922년에서 1932년 사이 10년 동안 활동한 구소련의 페르심판스라는 오케스트라다. 페르심판스는 ‘최초의 지휘자 없는 교향악단’의 줄임말이다.
이 악단이 단 10년 동안 존재한 것은 소련의 이념과도 관계된다. 토론을 통해 음악 작품의 해석을 결정한다는 페르심판스의 철학은 이른바 ‘민주집중제’를 표방했던 초기 소련에 들어맞았다. 그러나 1924년 스탈린이 집권하고 그에 대한 우상화가 심화되면서 ‘지도자 없는 조직’은 장려할 대상이 아니라 눈총을 받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결국 문을 닫은 페르심판스는 2008년에야 그 정신을 잇는 후배 음악가들에 의해 모스크바에서 부활했다.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가 다시 각광을 받은 것은 1972년 뉴욕에 오르페우스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설립되면서였다. 이 악단은 각 악기 파트가 돌아가며 리더를 정하고 이 리더들이 핵심 멤버 간의 리허설을 하면서 작품에 대해 논의한다. 명문 음반사 도이체 그라모폰(DG) 소속으로 70장 이상의 앨범을 내며 성공을 거두었고, 수평적 의사결정을 상징하는 ‘오르페우스 리더십’은 경영학 교본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 뒤에도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들이 나왔다. 2004년에는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그리말을 중심으로 한 ‘레 디소낭스’라는 악단이 등장했다. 이 악단도 ‘지휘자의 개입 없이 연주가들이 대화를 통해 음악적 언어를 탐구한다’는 모토를 표방했다. 설립 4년 뒤부터는 프랑스 디종 오페라의 상주악단이 되었다.
2007년에는 이탈리아 포르미지네에 ‘스피라 미라빌리스’라는 악단이 설립됐다. 베르누이가 발견한 수학적 곡선을 뜻하는 ‘놀라운 나선’을 악단 이름으로 정했다.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리허설에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악단은 오케스트라의 리허설이 단 한 번이나 두 번 열린 뒤 악단이 바로 무대에 오르곤 했던 관행에 제동을 건다. “우리는 리허설을 하며 함께 배우고 단원들 사이에 작품에 대한 해석을 구축한다. 그 다음에야 청중과 작품을 공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지휘자 없는 악단은 연주자들이 충분히 생각하고 토론해 연주에 반영하면서 예술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곡 해석이 지나치게 ‘규범적’이 되기 쉬운 데다 규모가 크고 복잡한 곡은 연주하기 힘들다는 한계도 있다. 지휘자가 독창적인 해석을 악단에 투사하는 기존의 연주 모델을 대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지휘자 없는 악단들의 실험들은 계속되어야 마땅하다. 예술적 다양성은 시대를 풍요하게 만드는 밑거름이 되며, 스피라 미라빌리스의 주장처럼 불과 한두 번 맞춰본 뒤 공연에 임하는 요즘 여러 악단들의 관습은 어딘가 아쉽고 실망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연주에 임하는 연주자들 모두가 곡 해석의 주체가 되면 그런 당당함도 연주에 직간접으로 반영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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