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키운 반려견 먼저 떠나보낸 뒤
주인 잃은 아픔 있는 ‘꼬맹이’에게 받은 위로
서로의 불행으로 함께한 둘의 만남 생각한다
오랫동안 함께해 온 반려견이 떠나고 나는 안을 수 있는 개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 주변 친구들 중에 고양이를 키우는 경우는 있어도 신기하게도 개를 키우는 사람은 없어서 만남을 핑계로 그럴 기회를 가져볼 수도 없었다. 그렇게 만져볼 개가 없다는 건 사실 대화할 개가 없다는 이야기. 길을 갈 때마다 마주치는 개들에게 시선을 주고 반가워하지만 그렇게 풍경으로 지나가는 개들에게는 나 역시 그런 존재에 불과할 것이었다.
꼬맹이를 만난 건 반려견을 잃고 몇 달이 지나고 나서였다. 작업을 위해 새로운 카페에 가서 앉아 있는데 마룻바닥을 타닥타닥 가볍게 걷는 발소리가 들리고 작은 몰티즈 한 마리가 내게 다가왔다. 자기를 만져달라는 듯 몸을 가까이 붙이더니 두 발로 서서 앞발로 나를 반겼다. 나는 카페에 갑자기 강아지가 나타난 것도 어리둥절한데 아무런 경계심 없이 구니 더 놀랐다. 등을 긁어주자 옆자리까지 뛰어 올라왔고 발라당 누우며 기쁨을 표현했다. 그렇게 둥근 머리와 부드러운 털과 작은 꼬리를 또다시 만져본 것은 반려견을 잃고 그간 듣고 구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위안이었다.
“얼마 전에 제가 강아지를 잃어서요.”
이제 그만 강아지를 데려가기 위해 다가온 주인에게 나는 평소답지 않게 먼저 내 얘기를 꺼냈다. 그 뒤에 붙이고 싶었던 말은 그런데 당신 강아지가 이렇게 자기를 만져볼 수 있게 하니 너무 고맙다였지만 목이 메어와 할 수 없었다. 겨우 꺼낸 말은 이름이 뭐냐는 것이었고 주인은 ‘꼬맹이’라고 알려주었다.
그 뒤로 일 년 가까이 꼬맹이와 카페에서 마주쳤다. 꼬맹이는 주인과 함께 오전 열한시쯤 산책 겸해서 카페에 나타났고 목을 죽 빼서 테이블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가며 인사했다. 그러다 누가 아는 척하면, 어 강아지가 있네, 하는 작은 기척이라도 내면 달려가 그가 자기를 만져볼 수 있게 했다. 내게도 한결같이 다정했다. 매장에 들어서서 오늘은 누구와 열렬한 해후를 해보나 하는 얼굴로 사람들을 살피다가도 내가 “꼬맹아!” 하고 부르면 곧장 달려왔다. 꼬맹이와 마주친 날이면 그 순간이 얼마나 좋았는지 이제는 볼 수 없게 된 반려견을 어떤 점에서 떠올리게 하는지 신이 나서 가족들에게 이야기했다.
“줄곧 사랑받은 존재들은 정말 태가 나는 것 같아.”
일단 매장에 들어설 때부터 기대에 차 있는 꼬맹이의 모습을 전하며 나는 그렇게 말했다.
“자기를 늘 환영하리라 믿으면서 아주 당당하게 들어와.”
얼마 전에도 카페에 앉아 있다가 꼬맹이를 만났다. 가까이 오면 이름을 부르려고 틈을 보고 있었건만 그날은 입구 쪽 남자 손님의 손길을 받으며 좀처럼 내 쪽으로 오지 않았다.
“강아지가 몇 살이에요?”
남자가 묻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속마음으로 대여섯 살쯤으로 어림잡아 보았다. 그런데 주인의 대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사실은 모릅니다. 전철역에서 떠도는 애를 데려와서 나이는 확실하지 않아요.”
그날 집으로 돌아가 나는 내 말을 정정했다. 조건이 갖추어진 뒤에야 관계에 대한 낙관이나 호의, 선의를 가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에 대해. 버려져 있었던 막막한 시간에 머물지 않고 인간에 대한 여전한 신뢰를 보여준 작은 개와, 그 개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며 거둔 주인의 이야기는 가장 자연스러운 삶의 회복에 대해 일깨워주는 듯했다. 남편은 어쩌면 꼬맹이가 카페 사람들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는 것도 잃어버렸던 이전 주인을 찾는 건 아닐까, 하고 물었다. 내가 떠나보낸 반려견을 떠올리며 꼬맹이와 인사했듯, 어쩌면 꼬맹이도 자기는 끝내 알지 못할 어떤 이유로 헤어져버린 그를 기억하며 자기 몸을 맡겼을지 모른다고.
우리가 어떻게 어떤 이유로 잠깐 만나 손길을 주고받을 수 있는지는 앞으로도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꼬맹이는 자기를 한번 쓰다듬어 보는 게 나라는 사람에게 왜 그렇게 중요한지 모를 것이고, 사람들이 자기를 한 번씩은 일별했으면 싶은 꼬맹이의 마음을 나도 알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 불완전한 이해와 우연한 조우가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해서는 너무나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예측할 수 없고 전혀 반길 수 없는 서로의 불행으로 함께하게 된 오전 열한시가 지닌 결코 작지 않은 의미에 대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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