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9일(현지 시간)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의 최대 쇼핑몰 ‘두바이몰’을 찾았다. 100만 m²(약 30만2000평) 규모의 대형 쇼핑몰 곳곳에 사람이 가득했다. 특히 프랑스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와 샤넬 매장 앞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 보였다. 일종의 두바이판 ‘오픈런’(영업 시작 전부터 줄을 지어 대기하는 행위)이었다.》
특이한 점은 쇼핑몰 곳곳에서 많은 러시아인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부 매장은 러시아어가 가능한 점원이 있다는 문구도 내걸었다. 하얀 피부, 금발의 한 남성에게 “러시아 사람이냐”고 묻자 그는 “그렇다. 푸틴, 스트롱맨”이라고 답했다. 따로 묻지도 않았는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그의 별명 ‘독재자(Strongman)’를 언급하는 것이 신기했다. 파키스탄에서 왔다는 택시 기사 무함마드 씨 역시 “러시아인 관광객이 매우 많다. 하루에 두어 번은 꼭 러시아 손님을 태운다”고 했다.
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서방의 강도 높은 경제 제재로 서구 주요국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러시아 상류층들이 대거 중동의 허브 두바이로 몰려드는 현상을 잘 보여준다. 치솟는 국제 유가로 주머니가 넉넉해졌지만 서방에 가서 돈을 쓸 수 없는 러시아 부호들은 비자 취득이 쉽고 제재가 없으며 반러시아 감정 또한 옅은 중동에서 지갑을 활짝 열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 영국 등 서구 주요국과 달리 재산 압류의 위험이 낮다는 점이 러시아 부호의 두바이행을 부추기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러, 두바이 부동산 매집
러시아 자본의 유입은 특히 UAE 부동산 시장에 불을 붙였다. 영국 BBC에 따르면 1분기(1∼3월) 러시아인의 두바이 부동산 구매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7% 늘었다. 한 부동산 중개업자는 미 CNBC방송에 “최근 석 달간 중개 수수료 수입이 400만 디르함(약 14억 원)에 달했다”며 대부분 러시아 고객으로부터 나왔다고 전했다.
미 뉴욕타임스(NYT) 역시 러시아인이 두바이에 보유한 부동산 가치가 최소 3억1400만 달러(약 4082억 원)라고 전했다. 러시아 부동산회사 ‘스페이스1’ 역시 최근 두바이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UAE에서 30년 이상 거주한 신동철 전 UAE 한인회장 역시 “러시아인은 특히 고가 부동산에 관심이 많다. 지난해 말과 비교했을 때 현재 고가 부동산 가격이 30∼40%씩 올랐다”고 전했다. 러시아 부유층은 특히 두바이 내 호화 인공섬 ‘팜주메이라’를 선호한다. 6월에는 이 지역의 3430만 달러(약 446억 원)짜리 호화 주택이 러시아인에게 팔렸다.
버트존 등 러시아인의 두바이 사업 정착을 돕는 회사도 속속 늘어나고 있다. 조지 호지게 버트존 최고경영자(CEO)는 BBC에 “우크라이나 침공 후 두바이 이주 문의가 침공 전보다 5배 늘었다”고 전했다.
러시아어로 발간되는 잡지도 여럿이다.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DW)에 따르면 두바이 내 대표 러시아 매체인 ‘러시안 에미레이츠’의 온라인 접속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꾸준히 늘고 있다.
러 호화요트 정박 활발
일부 러시아 재벌은 서구 주요국의 자산 동결 및 압류를 피하기 위해 호화 요트 등 값비싼 자산을 두바이에 두고 있다. 앞서 3월 영국 정부는 러시아의 대표 에너지 재벌 겸 영국 프리미어리그(EPL)의 명문 구단 ‘첼시’를 소유했던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영국 내 자산을 동결했다. 지난달 미국 법원 역시 아브라모비치가 소유한 4억 달러 상당의 전용기 두 대를 압수하겠다는 영장을 발부했다. 이런 일을 당할 가능성이 낮은 두바이를 일종의 재산 도피처로 이용하겠다는 의도다.
포브스 기준 재산이 306억 달러(약 40조 원)에 달하며 미국과 유럽의 제재 대상에 오른 광산재벌 블라디미르 포타닌(61)은 3억 달러(약 3900억 원)짜리 호화 요트 ‘너바나’를 보유하고 있다. AP통신에 따르면 이 배는 지난달부터 조세회피처 케이맨제도의 깃발을 달고 두바이에 정박하고 있다.
러시아 철강재벌 겸 하원의원이며 역시 미국의 제재 명단에 오른 안드레이 스코치(56)의 요트 ‘마담 구’ 또한 3월부터 두바이에 머물고 있다. 1억2000만 달러로 6개의 스위트룸, 엘리베이터, 헬기 착륙장 등을 갖췄다.
러시아 정부는 서방의 제재로 미 달러가 부족해지자 자국민이 출국할 때 1만 달러(약 1300만 원) 이상을 반출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이에 일부 부호들은 두바이에 있는 대리인에게 가상화폐로 돈을 보내고, 이 대리인이 이를 현금으로 바꿔 두바이에 도착한 부호에게 건네주는 방법을 이용하고 있다.
이런 식의 교환이 성행하자 6월 UAE를 찾은 월리 아데예모 미 재무차관은 “UAE로 흘러드는 러시아 자금 흐름을 면밀히 감시해 달라”며 UAE 정부를 압박했다. 주요국 정부처럼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하고 올리가르히의 자산 또한 동결하라는 의미다.
UAE, 서방-러 사이 줄타기
현재로선 UAE가 미국의 이런 요구에 동참할 가능성은 낮다.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일종의 완충 지대 노릇을 하며 경제 성장을 추구하겠다는 속내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로이터통신은 “UAE는 여전히 러시아인이 바로 비행기를 탈 수 있는 몇 안 되는 국가”라며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거나 자국으로 몰려드는 올리가르히의 재산을 동결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전했다.
인플레이션, 각국 중앙은행의 공격적 금리인상 등에 따른 세계 경제 침체 우려가 높지만 앞서 4월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UAE의 국내총생산(GDP) 증가율 전망치를 지난해 10월(3.0%)보다 1.2%포인트 올린 4.2%로 제시했다. 한국, 미국, 일본, 중국, 유럽연합(EU) 등의 성장률 전망치를 하향한 것과 대조적이다. UAE 정부는 올해 5.4% 성장까지 가능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UAE는 6일 “1년 안에 300개 외국 기업을 유치하고 2030년까지 GDP 규모를 현재의 약 두 배인 8160억 달러(약 1058조 원)로 만들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빈 아흐마드 알제유디 통상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의 기업들에게 세계에서 UAE가 거주, 사업, 투자를 위해 가장 좋은 곳임을 보여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다만 일부 시민은 “서민들은 ‘러시아 머니’로 인한 경기 호황을 체감하기 어렵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채소과 과일의 20%만 자국에서 생산할 정도로 식량 자급률이 낮은 UAE는 각각 주요 곡물 생산국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격화된 ‘애그플레이션(농산물 위주의 물가 상승)’ 후폭풍을 톡톡히 겪고 있다. 한 시민은 “지난해와 비교할 때 식료품 가격이 최소 20, 30%씩 올랐다. 경제가 호황이라는데 내 수입은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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