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죽기전 멜로디]납량특집! 도깨비 파티에 다녀오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7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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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저녁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열린 ‘PAKK X EERU’ 콘서트의 한 장면. 밴드 잠비나이의 리더 이일우(왼쪽)는 
피리, 태평소, 생황을 번갈아 불고 컴퓨터 음향을 섞어가며 밴드 팎(오른쪽 세 명)의 뜨거운 록에 스산한 기운을 더했다.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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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저녁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열린 ‘PAKK X EERU’ 콘서트의 한 장면. 밴드 잠비나이의 리더 이일우(왼쪽)는 피리, 태평소, 생황을 번갈아 불고 컴퓨터 음향을 섞어가며 밴드 팎(오른쪽 세 명)의 뜨거운 록에 스산한 기운을 더했다. 국립극장 제공
임희윤 기자
임희윤 기자
‘전설의 고향.’

전설, 고향. 두 단어를 떼놓으면 무서울 게 하나도 없다. 심지어 된장찌개가 생각나는 구수하고 정감 있는 말들. 근데 왜 어린 시절 TV에서 해주는 ‘전설의 고향’은 하나같이 그리 무서웠을까. ‘내 다리 내놔라∼!’의 전율부터 ‘삼년고개’의 반전까지…. 한반도 굽이굽이에 서린 전설 이야기에 매년 여름밤이 기다려졌다.

1994년 MBC TV 미니시리즈 ‘M’은 또 어땠고…. ‘나는 널 몰라∼’의 상향 선율이 선연한, 안지홍 작곡가가 만든 주제가는 지금 들어도 ‘이런 곡을 지상파에 매주 틀다니!’란 생각이 드는 희대의 ‘괴곡(怪曲)’이 따로 없다.

#1. 납량특집….

지구 온난화는 덜했다고 해도 옛날 여름은 에어컨이 없어 더 더웠다. 갈색 나무 서랍에서 꺼낸 빨간 사인펜을 들고 앉아 신문을 펼치면 TV 편성표 면에 저런 단어가 드문드문 보였다. 납량(納(량,양))이란 말부터가 퍽 매력적. ‘여름철에 더위를 피하여 서늘한 기운을 느낌’이란 뜻인데 그 생김새와 어감이 압권이다. 피서(避暑)처럼 받침도 매가리도 없는 단어보다 어딘지 더 어둡고 음습하며 ‘나쁜’ 느낌을 풍겼다. 납량의 매혹에 이끌려 납량특집 드라마는 빠지지 않고 보려 했다.

#2. 15일 저녁, 국립극장 주최 ‘여우락 페스티벌’ 일환으로 열린 ‘PAKK X EERU’의 ‘고요한 씻김’이란 공연은 제대로 된 납량이었다. 록 밴드 팎(PAKK)과 국악인 겸 로커 이일우(EERU)의 합작 콘서트. 먼저 팎이 대박이다. 2017년 첫 미니앨범 제목이 ‘곡소리’. 그해 정규 1집 타이틀은 ‘살풀이’다. 지난해 낸 2집 간판은 ‘칠가살(七可殺)’. 하드록과 헤비메탈을 오가는 거친 음악을 펼치는데 그 소재가 주로 한국적 한과 분노다. 장르로 치면 살풀이 록이랄까. 이일우는 해금, 피리, 거문고를 록과 결합한 밴드 ‘잠비나이’의 리더다. 그러니 저 공연 타이틀의 ‘고요한’은 속된 말로 뻥이었다.

#3. 3인조 팎이 지글지글 끓여대는 100℃의 록에 이일우는 이따금 피리와 태평소를 불어넣어 한기(寒氣)를 더했다. 팎의 멤버들은 곡이 끝날 때마다 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동동동∼’ 울리는 대신 ‘뚜다따땅!’ 튕겨대는 슬랩(slap) 주법의 베이스기타, 현(絃)을 갈아낼 듯 동분서주하는 전기기타, 북과 심벌을 통타하며 영화 ‘매드맥스’의 추격대처럼 전진하는 드럼…. 이쯤 되면 관객 입장에서 국립극장의 고상한 객석에 편하게 앉아 듣는 게 미안할 지경이다. 위장크림을 바르고 소총을 들고 나가 산악 기동이라도 하며 들어야 할 듯 아드레날린이 체내에 솟구친 것이다.

#4. 관객들은 아닌 게 아니라 들썩들썩했다. 앉은 채로 헤드뱅잉을 하거나 몸을 흔드는 이들도 여럿. 무대 위 걸작은 스크린에서도 뿜어져 나왔다. 팎의 리더 김대인(보컬, 기타)이 직접 디자인한 앨범 표지, 서호성 뮤직비디오 감독이 만든 영상 속의 지옥도가 라지웅 비디오 아티스트의 손길을 만나 생동했다. 저승에 끌려온 것으로 보이는 인간 군상을 도깨비가 내려쳐 펄펄 끓는 냄비 속으로 처박거나 이름 모를 동식물이 기괴한 모습으로 펄럭이는 모습들…. 이것은 매우 음악적인 ‘전설의 고향’이 아닐 수 없었다!

#5. 올해 들은 가장 인상적인 케이팝 아이돌 노래를 떠올려 본다. 메탈 곡을 연상시킬 정도로 강렬한 에스파의 ‘Girls’, ‘미친×이라 말해’의 가사가 돋보인 (여자)아이들의 ‘TOMBOY’도 있지만 킹덤의 ‘승천’도 만만치 않았다. 솔직히 인트로부터 소름 돋았다. 그윽한 피리의 추성(推聲·음을 위로 밀어 올리는 시김새)이 섬뜩한데 마치 텅 비어 좀비 소굴이 된 대궐 문을 삐걱 여는 듯한 느낌이다. ‘거역한 자들아/혈루에 잠겨 죽으리라’ ‘단죄의 칼/내 어명을 잊지 말지어라’의 노랫말에 상응하는 한국적 선율과 해금, 가야금의 진격은 한국적 공포를 케이팝과 엮은 뜻밖의 쾌작을 완성했다.

#6. 전통 문화, 그중에서도 민간 설화에 기반한 한국 음악이 더 많아지기를 은근히 바라본다. 한국적 공포의 진경은 넷플릭스 ‘킹덤’ 같은 영상 작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스마트폰 화면은 손바닥만 하지만 청각적 공포 음악은 눈을 감는 순간 무한대의 스크린으로 확장된다. ‘PAKK X EERU’의 공연을 기획한 ‘여우락 페스티벌’에서 여우락은 ‘여기 우리 음악이 있다’의 준말이다. 여기 우리 납량이 있다! 자, 이제 ‘납량특집! 케이팝 대제전’ 따위의 기괴하고 전설적인 음악 축제의 등장을 기대해본다.

‘끼이이익…!’




#납량특집#도깨비 파티#전설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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