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용]경찰도 헛갈린 ‘우회전 규제’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7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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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숫자 몇 개 줄이느냐보다 후진규제 재설계, 질적 개혁해야

박용 부국장
박용 부국장
경찰이 교차로 우회전 시 횡단보도 일시정지 관련 계도 기간을 두 달 더 연장하기로 한 건 규제가 설익었다는 뜻이다. 새 규제는 선진국의 갑절인 보행 중 교통사망자 비율(38.9%)을 떨어뜨리기 위해 필요한 조치다. 하지만 선의나 범칙금으로 결과를 만들 순 없다. 단속하는 경찰관마저 헛갈리면 지킬 수 없는 규제가 된다.

논란의 쟁점은 교차로 우회전 시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통행하려 하는 경우’에도 일시정지해야 한다는 규정이다. 운전자들은 운전하기도 바쁜데 보행자 마음까지 읽는 독심술이라도 배워야 하느냐고 항변한다. 논란이 커지자 경찰청은 보행자가 △횡단보도에 발을 디디려는 경우 △손을 들어 운전자에게 횡단 의사를 표하는 경우 △횡단보도 인근에서 신호 등 주위를 살피는 경우 등을 예로 제시했다. 혼란이 일기 전에 내놓았어야 할 지침이다. 더 단순화할 필요도 있다. 운전자가 횡단보도 인근 보행자가 주위를 살피는지 확인하라는 건 모호한 주문인 데다 현실적이지도 않다. 운전이 복잡해지면 신호 위반이나 사고 위험이 커진다.

우회전 일시 정지 규정은 미국에도 있지만 한국처럼 혼란은 없다. ‘스톱(멈춤)’ 표지판이 있으면 차를 완전히 정차하고 좌우를 살핀 뒤에 지나가는 ‘스톱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 운전자들은 교차로에서 신호등이 없어도 스톱 사인이 있으면 멈췄다가 먼저 온 순서대로 간다.

뉴욕주 운전면허 매뉴얼은 “적신호에서도 완전히 정차한 뒤에 신호를 받아서 오는 차량이나 보행자에게 양보한 다음 우회전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단, 뉴욕 시내는 적신호에 우회전할 수 없다. 캘리포니아주 운전면허 핸드북에도 “우회전 금지 신호가 없으면 적신호에서 우회전할 수 있다”고 돼 있다. 멈췄다가 보행자 등을 주의하면서 우회전하라는 것이다. 스톱 문화가 먼저 뿌리를 내리면 빨간불에 일시정지를 하고 우회전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진다.

미국에서도 운전자는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하면 멈춰야 한다. 캘리포니아주 규정엔 “보행자가 당신과 눈이 마주쳤다면 건널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보행자에게 양보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보다 더 단순하고 명료하게 행위를 규정한다.

교통 법규든, 경제 제도든 일방적이고 복잡하면 지키고 싶어도 못 지킨다. 부동산 규제가 대표적이다. 정부는 1970년대 이후 전문가들의 반대에도 부동산 투기를 잡기 위해 세금을 동원했다. 이 결과 한국의 부동산 세제는 선진국 중 가장 복잡한 누더기 세제로 전락했다. 행위마다 4∼5개 세목이 적용되고 1개 세목 안에서도 과세 항목마다 세율이 다르다. 국민들에겐 암호나 마찬가지다. 훈련받은 전문가도 쩔쩔맨다. 양도소득세가 워낙 까다로워 ‘양포세’(양도세를 포기한 세무사)라는 말까지 나왔다.

정권이 바뀌면 냉탕온탕을 오간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부동산 규제 정책으로 활용된 종합부동산세제를 정상화할 필요가 있다”며 다주택자 중과세율 등을 폐지하는 대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누더기 부동산 세제를 국민들이 알기 쉽게 간소화하는 근본 개혁은 수십 년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새 규제가 덧대진다. 새 정부에서 상생임대인 지원 제도를 내놨는데, 집주인이나 세입자 모두 누가 상생임대인인지 한참 연구해야 한다.

지켜야 할 사람을 고민하게 하는 규제는 후진 규제다. 걸면 걸리는 식이 되고 공무원의 입김은 커진다. 규제 개혁이 성공하려면 규제를 수백 개 없앤다는 식의 실적 채우기보다 후진 규제를 솎아내고 예측 가능하게 재설계하는 질적 규제 혁신이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

#우회전 규제#경찰도 헛갈려#후진규제 재설계#질적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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