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비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책임은 출산이다. 숙종, 경종, 영조, 정조, 순조에 이르기까지 총 아홉 명이나 되는 왕비가 있었지만 자식을 낳은 왕비는 인경왕후 2녀와 순원왕후 2남 3녀가 전부였다. 나머지는 모두 후궁에게서 낳은 자식들이다. 정식 왕비는 아니었지만 세자빈인 혜경궁 홍씨는 2남 2녀를 낳고 2번의 유산을 겪었다.
홍씨는 첫아들로 의소 세손을 낳게 되지만 두 번째 임신에서는 유산을 하게 된다. 유산 후에 다시 임신한 아들이 바로 정조 이산. 유산을 경험한 여성의 대부분은 체력이 떨어지면서 유산이나 불임으로 갈 확률이 더 커지지만 홍씨는 이런 난관을 모두 극복하고 정조를 낳았다. 홍씨는 과연 어떻게 유산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일까.
‘동의보감’은 유산을 밤에 비유해 설명했다. “정상적인 출산은 밤송이가 저절로 벌어져서 송이나 밤톨이 아무런 손상 없이 분리되는 것과 같다. 유산은 채 익지 않은 밤송이를 따서 껍질을 억지로 비벼 밤톨을 발라내는 것과 같다.”
현대적으로 볼 때도 기구를 이용해 자궁 내부 점막을 긁어내는 것은 혈관과 점막에 손상을 불러온다. 연약한 피부 점막인 자궁 내막에 상처가 나면서 나쁜 혈액들이 그곳에 정체되어 병적인 상태가 된다. 이를 한방에서는 ‘어혈(瘀血)’이라 한다. 유산 후 임신의 과정은 마치 새로운 벽지를 바르는 작업에 비유할 수 있다. 기존 벽지를 제대로 뜯어내고 새 벽지를 발라야 깨끗한 마무리가 되는 것처럼 태반이 자궁에 붙었다가 떨어지면서 점막층에 붙은 이물질을 얼마나 잘 제거하느냐가 다시 임신할 수 있는 필요조건이 된다.
혜경궁 홍씨는 유산 후에 ‘궁귀탕’이라는 처방의 약을 먹고 정조를 출산했다. 정조 출산 이후 홍씨는 영조의 양위소동과 사도세자의 정신병 발작 등 비극적인 궁중 상황으로 인해 또다시 유산을 하게 된다. 그때도 홍씨는 궁귀탕을 먹고 기력을 차렸다. 궁귀탕에 들어가는 당귀와 천궁의 용량 비율을 원래 5 대 5에서 6 대 4로 변경하면 부처님 손처럼 아기를 순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이름의 ‘불수산(佛手散)’ 처방이 된다.
당귀 천궁 중, 당귀는 당귀부(當歸夫)의 준말로, 남편을 떠났던 불임 여성이 당귀를 먹고 자궁을 튼튼하게 한 뒤 다시 집으로 돌아가 임신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귀(歸)’는 특히 돌아간다는 의미로, 당귀는 실제 악혈(惡血)이 심장에 쏠려 기절하거나 답답한 증상을 안정시켜 제자리로 돌려주는 기능을 한다.
임신 유지와 출산을 위한 수태(瘦胎) 처방 중에는 ‘달생산(達生散)’이라는 게 있다. 태아가 너무 커 출산에 부담이 될 때 쓰는 처방이다. 출산 1개월 전후로 초산이 난산의 우려가 클 때 사용한다. 혜경궁은 첫 번째 의소 세손 출산 시 먹었고 현종 왕비인 명성왕후나 순조의 부인인 순원왕후, 숙종의 부인인 인경왕후 등도 복용했다. 기 순환을 촉진하고 부드러운 이뇨 작용을 하는 대복피라는 약재가 들어 있어 태아의 다이어트에 도움을 준다. 필자도 첫아이 출산 때 이 처방을 썼는데 바짝 마른 아이가 태어나 그 효능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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