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성이냐, 방향성이냐.’ 이것은 공공 공간의 성격을 가르는 주요 요소다. 길과 광장은 누구나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공 공간의 대표적인 두 가지 형태다. 6일 재개장한 광화문광장은 광화문 앞길로서 길과 광장, 중심성과 방향성을 오가며 우리나라 역사를 관통한 대표적 공간이다. 새로운 광장 앞에서 우리는 이 독특한 공공 공간의 궤적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만 해도 이곳은 육조거리였다. 임금의 행렬이 지나가는 ‘길’이자 상소와 격쟁, 무예 시범과 연희가 일어나는 ‘광장’이기도 하였다. 폭이 55m가 넘고 길이는 그 10배 정도 되는 이 공간은 돌로 만든 둥근 문을 세 개나 가진 당당한 광화문을 정면에 뒀다. 좌우로는 기와지붕이 반듯한 육조의 행랑채가 나란하며, 남쪽으론 종로로 이어지는 큰길과 낮은 언덕으로 가로막힌 큰 마당이었다.
대한제국기에 이르러 이곳에 크나큰 변화가 생긴다. 광화문 앞길이 네거리가 되면서 막힌 공간이 트이고 자체적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인력과 중심성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정동에 자리 잡은 고종 황제가 삼거리로 막혀 있던 광화문 앞길을 덕수궁까지 연장하며 본격적인 물꼬를 튼 것이다. 광화문 입구를 네거리로 만들고, 그곳에 자신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칭경기념비전을 세웠다.
그러나 일제의 강점은 이 길에 기묘한 방향성을 더하게 된다. 다시 말해 제국주의 권력을 향한 종축의 방향성이다. 그 계기는 1926년 경복궁에 총독부 신청사가 들어서면서다. 1939년에는 총독 관저(지금의 청와대 자리)도 그 축의 끝에 들어섰다. 광복 후에도 중앙청으로 이름만 바꾼 총독부에서 제헌 국회가 열리고 초대 대통령이 취임하였다.
광복 이후 광화문 주변은 혼돈의 장이었다. 이념과 가치가 섞이고 충돌한 근대사를 빼닮은 공간이었다. 당시에도 총독부나 관저 건물이 좋아서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일본을 싫어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으로 중앙청 건물이 피해를 보자, 수리비를 핑계 대고 다시 사용하지 않았다. 이를 수리하여 다시 정부의 청사로 사용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의 일이다. 이후 여러 차례 국회 등에서 중앙청 사용의 불가함이 논의되었으나 그때마다 정부는 비용 조달의 어려움을 핑계 댔다.
군사 정권은 광화문 주변에서 일제의 잔재를 덜어내고 거기에 새로운 권력의 색을 덧칠하려 했다. 정부는 중앙청 철거 대신 1968년 철근콘크리트로 광화문을 만들어 총독부 건물의 앞을 가렸다. 반대편 길 입구에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세웠다. 식민 도시의 기억을 감추려는 노력이었다. 1970년, 광화문 바로 앞에 당시로선 최고 높이를 자랑하는 정부종합청사를 미군의 기술 도움으로 건설했다. 1971년에는 광화문 네거리에 대형 철제 아치 선전탑을 세웠다. 현대식 개선문과 민족 영웅의 동상, 전통 건축의 복제품, 미국 및 일본과 관련된 두 개의 정부청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울을 서울로 만든 주산인 북악산과 청와대가 직선으로 이어지는 이 장면은 한국의 현대를 상징하는 경관이자 국가 상징축이 되었다.
이러한 방향성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약화됐다. 광화문 일대의 공간적 성격이 다시 한번 크게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중앙청의 철거가 시작되어 1996년 완료되면서 광화문 앞길의 방향성은 크게 약해졌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은 약화된 권력 지향 위로 완전히 새로운 중심성을 대두시켰다. 수십만 인파가 몰려와 광화문 네거리에서 벌인 시가 응원전이 이 공간의 정체성을 일순 바꿔놓은 것이다. 대한제국 때 처음 만들어진 광화문 네거리의 너른 품, 개방적이고 자율적이며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중심성이 회복됐다. 회복을 넘어 강화됐다.
2009년, 이에 고무된 서울시는 광화문 앞길에 있던 중앙분리대와 찻길 일부를 덜어내고 폭 34m의 공지를 만들어 광화문광장의 이름을 내걸었다. 그러나 길도 광장도 아닌 어정쩡한 이 공간은 곧 청와대를 향해 소리치는 정치 집회의 장이 되었고, 광화문 네거리에선 지향이 다른 정치적 집회가 열려 ‘두 개의 광화문’이 대립하였다. 그리고 이제 정치 집회는 불허하겠다는 새로운 광화문광장이 조성되기에 이르렀다.
새로 연 광화문광장은 어떨까. 청와대의 이전은 열린 중심성 회복의 추세를 가속하여 광화문 일대의 공간이 길에서 광장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권력 기관을 향한 방향성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할, 너른 가슴과 포용적 중심성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순신 장군 동상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듯해서 어색했던 세종대왕상이 그 앞으로 긴 경사로로 이어지는 앞마당을 갖게 된 점은 다행스럽지만, 주변에 이것저것 작은 공간들이 제각각의 이름을 내걸고 서로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마치 난장(亂場)을 보는 것 같아 불편하다. 한쪽으로 밀어 옹색하게 남긴 차도도 어색하다.
새로운 광화문광장에 부족한 것은 비움의 미학이다. 역사적으로 늘 그래왔던 것처럼, 광장은 비어있음으로써 채움을 대비하고, 그 채움의 색깔을 차별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어떠한 광화문광장을 원하는가 하는 질문은 곧 우리에게 서울은 누구의 도시인지를 묻는 것과 같다. 아니, 과연 우리가 누구인지에 관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권력을 향한 치열하고 냉혹한 방향성이 사라진 자리에 필요한 것. 그것은 진정한 비움, 따뜻한 포용으로 가득한 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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