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옌볜(延邊)에서는 중국어를 못해도 괜찮다.’ 중국 옌볜 조선족자치주에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던 말이다. 거리에는 포차, 노래방, 숯불구이 등 한글로 된 대형 간판이 즐비하고 ‘가리봉’, ‘미아리’ 같은 한국 지명을 딴 식당 이름들도 눈에 들어온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조선족들은 중국 내 거주지역에 따라 미묘하게 다른 사투리까지 구별한다. 170만 명의 조선족이 거주하는 이곳은 한국 내 차이나타운보다 더 한국 같다.
▷앞으로는 조선족 자치주에서 한글 간판이나 광고를 찾아보기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된다. 주정부가 한자와 한글을 병기하되 한자를 우선 표기하는 규정을 만들어 시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규정에 맞지 않는 현판이나 표지판은 모두 교체해야 한다. 간판뿐 아니다. 조선족 학교에서 교과서는 이미 2020년부터 한글로 된 교과서 대신 중국어 국정 교과서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내년부터는 대학 입시에서 소수민족 가산점이 없어지고 역사, 정치, 어문 과목 시험은 중국어로 치러야 한다.
▷북간도로 불리는 백두산 이북 지역에 터 잡은 조선족은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중에서 13번째로 수가 많다. 중국 국적이지만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민족 정체성을 갖고 한국 문화와 전통을 살려온 사람들이다. 문화대혁명 당시 한글로 된 책들이 불태워지고 한국말을 가르치던 조선족 교사들이 홍위병들에게 탄압받은 아픈 기억도 갖고 있다. 그래도 소수민족 중에서는 최초로 민족대학을 설립하는 단결력도 보였다. 그런 조선족도 ‘중화민족 공동체론’을 앞세우는 중국 정부의 강력한 한화(漢化) 정책은 피할 수 없게 된 모양이다.
▷“문화 말살 정책”이라는 비판에도 중국 정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소수민족의 정체성을 약화시키고 이들을 한족 문화에 동화시키려는 정책은 오히려 강화되는 추세다. 2017년 신장위구르 자치구, 2018년 티베트 자치구, 2020년에는 네이멍구 몽골족 자치구에서 중국어 교과서 사용 의무화 등을 밀어붙였다. 항의 시위에 나선 주민들은 분열선동 혐의로 검거하고, 거리에는 탱크를 내보냈다. 특히 독립 움직임을 보이는 자치구에는 가차 없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해 7년 만에 열린 소수민족 정책 회의에서 “사상적 만리장성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민족 분열의 독소’를 숙청해야 한다고도 했다. 소수민족의 문화적 다양성을 발전의 동력이 아닌 분열의 뿌리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각 민족의 말과 글, 그것이 지켜내는 정체성은 억지로 빼앗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인위적으로 약화시킨다고 해서 ‘사상의 만리장성’이 세워지는 것도 아니다. 되레 문화적 역풍만 불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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