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뉴욕 특파원 임기가 끝날 무렵, 그동안 신세 졌던 지인들에게 맨해튼에서 점심을 샀다. 세 명이서 파스타 하나씩과 조금씩 덜어 먹을 간단한 요리 하나, 커피 정도 시켰을 뿐인데 음식값이 240달러(약 31만 원)나 찍혀 나왔다. 그런 비싼 도시에서 살다 온 탓인지, 서울에 돌아온 후 며칠간은 모든 물건값이 너무 싸게 느껴졌다.
하지만 착시에서 벗어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비록 뉴욕 수준의 ‘살인 물가’나 남미 같은 ‘초(超)인플레’는 아니지만 우리나라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생활 물가가 많이 올라 있었다. 특히 1만 원에 근접하는 계란 한 판 가격은 뉴욕 여느 부촌의 마트 못지않았다. 물가지수가 외환위기 이후 처음 두 달 연속 6% 이상 오른 가운데, 체감물가 상승률도 8%에 육박하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지금의 경제 상황을 ‘복합 위기’라고 부른다. ‘복합’이라는 단어에서 보듯,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위험 요인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글로벌 인플레이션과 미국의 강한 긴축 움직임, 우크라이나 전쟁과 에너지 가격 급등,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봉쇄, 공급망 위기, 대만을 둘러싼 미중 간 지정학적 위기 등이 전 세계를 짓누르고 있다. 지금의 복합 위기는 이 중 어느 한두 가지가 잠잠해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각기 다른 요인들이 중첩, 증폭되면서 장기간 계속될 여지가 크다.
그런 양상을 제대로 보여주는 게 최근 물가 흐름이다. 지금의 인플레이션은 장기 저금리에 따른 유동성 확대, 생산·물류 차질, 수요 증가, 에너지값·인건비 상승 같은 요인들이 한데 뒤섞여 발생했다. 물론 최근 들어 국제유가가 내리고 일부 물가지표가 둔화되면서 인플레이션도 곧 고비를 넘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기고 있다. 하지만 낙관하기엔 이르다. 유럽발 에너지 대란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라 유가 등 연료비는 얼마든지 고공비행으로 방향을 틀 수 있다. 또 근로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가 거세지고 있는 데다 각국의 공급망 차질도 여전하다. 앞으로 상당 기간은 예전의 저물가 시대로 복귀하는 게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살인적 인플레이션이 이번 복합 위기의 ‘전반전’이라면 후반에는 더 큰 괴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각국이 고통스러운 긴축으로 힘겹게 고물가와 싸우다 보면, 자칫 물가는 못 잡은 채 경기만 고꾸라지는 스태그플레이션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크다. 미국은 이미 2개 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고, 유럽 역시 우크라이나 전쟁의 직격탄을 맞았다. 2분기 성장률이 0.4%로 곤두박질친 중국도 올해 성장 목표치를 포기한 지 오래다. 신흥국들은 국가부도 도미노가 우려되고 있다. 세계 어디에도 멀쩡한 곳이 없다.
효율과 분업, 자유무역을 근간으로 성장하던 세계 경제가 봉쇄와 규제, 안보 위기로 멍들어 가면서 한국도 그간의 경제 발전 공식을 새로 써야 하는 처지가 됐다. 지금 모든 위기의 근간이 된 탈세계화(deglobalization) 추세는 미국의 긴축이나 코로나 사태가 끝나더라도 계속될 공산이 크다. 이 새로운 판에 적응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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