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2년 8월 어느 날. 빌라 반지하의 ‘창고’를 임차하러 온 나에게 집주인은 이렇게 당부했다. 내가 이곳에서 먹고 자려고 하는 것은 나도 알고 그도 안다. 주인의 말이 무색하게 창고에는 싱크대와 화장실이 설치돼 있고, 전에 살던 세입자가 놓고 간 낡은 옷장은 여전히 쓸 만했다. 반지하 주거가 ‘불법’이라 가스가 연결되지 않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주인이 보증금을 500만 원이나 달라는 건 영 꺼림칙했다. 만에 하나 건물이 경매에라도 넘어간다면 전입신고를 하지 않은 나는 전 재산인 보증금을 건지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창문이 없고, 비좁은 고시원에서 나온 것이 어딘가. 어쨌든 이곳은 확실히 싸다. 반지하가 불법이 되니 요즘은 옥탑방 임차료도 올랐다.
공공임대주택도 알아봤지만 일터와 거리가 너무 멀었다. 직장과 가까운 곳은 보증금이 만만찮았다. 무엇보다 요즘 입주 대기자가 너무 많다. 거주가 불법화된 서울 반지하 가구의 이주 수요를 임대주택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는 탓이다. 세입자가 떠나고 빈 옆집 반지하에는 밤에 이상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 같다. 마약이라도 하는 건 아닌지 무섭다. 오늘은 비가 많이 온다. 설마 잠기는 것은 아니겠지….
이상은 지금부터 10년 뒤 반지하에 사는 것이 법으로 금지됐다고 가정하고, 서울의 한 반지하 세입자의 사연을 가상으로 적어 본 것이다. 최근 기록적 폭우로 반지하 주민 4명이 잇따라 아까운 목숨을 잃자 서울시가 대책을 내놨다. 정부와 협의해 지하·반지하는 주거용으로 신축을 불허하도록 건축법을 개정하겠다는 것이었다. 또 기존 지하·반지하 주택은 ‘유예기간’을 두고 비주거용으로 전환하도록 유도해 사실상 퇴출하겠다고 했다. 볕이 잘 들지 않아 습하고, 안전마저 위협당하는 반지하를 줄여나가면서 시민들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겠다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퇴출’은 다른 문제다. 조금이라도 임차료가 싼 집을 찾는 수요는 언제나 있다. 모아 둔 목돈이 없는 흙수저 청년, 자녀가 있어 넓은 공간이 필요한 부모, 소득이 없거나 적은 노인 등이 거주비용 대비 입지가 좋거나 공간이 넓은 반지하를 찾는다. 반지하 거주를 불법화했다가는 거주자들이 오히려 법의 각종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주 대책도 정말 실현될지 모르겠다. 서울시는 공공임대주택 23만 채를 신규 공급해 20만 가구에 이르는 반지하 주민이 입주할 수 있게 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서울 시내에 공급된 공공임대주택은 24만 채 수준이다. 이를 2배 가까이로 늘리겠다는 것이다. ‘20년 동안’이라는 토를 달았지만 만만한 목표가 아니다. 이미 서울주택도시공사(SH) 부채는 17조 원이 넘어 전국 도시개발공사 가운데 가장 많다. 게다가 반지하 외에도 주거취약계층이 많은데, 이들은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논란이 확산되자 오세훈 서울시장은 18일 “반지하 퇴출이 아니라 감축”이라고 물러섰다. 혹시 시장으로서 선명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의욕만 앞섰던 것은 아닌지 지금이라도 돌아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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