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일본이 한국을 병합했을 때, 서양 열강은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3·1운동을 일으키며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했지만, 고독했다. 그러나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서양 열강은 아무도 이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중국은 탐욕스러운 서양 열강조차도 감히 혼자 먹으려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 황금어장인데, 그 일부인 만주를 일본이 독차지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일본이 무리수를 두기를 바라고 있던 한국의 전략가들은 ‘드디어 때가 오나?’ 하며 사태를 주시했다. 193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특명전권 수석대표 이승만을 만주사변을 다루고 있던 제네바의 국제연맹에 파견했다.》
만주에서 폭주하는 관동군
당시 만주는 중화민국의 통치가 미치지 못하고, 군벌 장쭤린(張作霖) 장쉐량(張學良) 부자가 지배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현상 유지를 원했으나, 다롄(大連)에 주둔하던 관동군은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만주를 러일전쟁을 통해 획득한 전리품 정도로 여겼다. 장씨 군벌과 관동군의 갈등이 심해지자, 관동군은 1927년 장쭤린의 기차가 지나가던 철로를 폭파해 그를 죽여 버렸다. 아들 장쉐량이 일본에 적대적으로 돌아선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일왕 히로히토가 이 사건을 문제 삼아 당시 수상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사실상 경질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도쿄 정부는 관동군의 폭주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관동군 참모들의 욕망은 이미 정부 손아귀를 벗어나 넘실대고 있었다. 1931년 9월 18일 선양(瀋陽) 부근 류탸오후(柳條湖)를 지나던 철로가 폭파되었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획득한 남만주철도 선로였다. 관동군의 자작극이었지만, 이를 중국의 소행으로 몰아붙이며 만주 전역에 병력을 진주시켰다. 관동군은 1만4000명, 장쉐량 병력은 19만 명이었으나,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장쉐량은 휘하 병력에 저항하지 말라고 명령했고, 관동군은 삽시간에 만주를 장악했다.
세계 각국 정부는 경악했다. 즉각 국제연맹이 소집되고 일본군의 자제를 촉구하며 진상조사단을 꾸렸다. 국제사회의 압력을 피하고자 관동군은 ‘민족자결’의 논리를 내세웠다. 사변 발발 직후 펑톈(奉天) 자치유지회라는 단체가 독립을 선언했다. 관동군은 만주인들이 스스로 중국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 독립선언 자체가 그들의 작품이었다. 관동군은 남만주와 내몽골의 동부 지역을 ‘만몽(滿蒙)’이라 부르며 일본의 세력권으로 만들 생각이었기 때문에 민족자결 운운은 그야말로 궤변이었다. 자유주의 지식인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이런 행태를 보고는 “일본의 군인은 마치 의화단 같구나”라고 한탄했다(가토 요코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도쿄 정부도 경악했다. 정부 역시 ‘만몽’에 대해서만큼은 다른 서양 국가와 다른 특수한 권리, 이른바 만몽특수권익(滿蒙特殊權益)이 일본에 있다고 암암리에 생각하고 있었지만, 국제사회와 충돌할 걸 우려해 신중한 태도로 일관해 왔었다. 일왕 주변, 금융자본가, 해군의 조약파(평화파), 중국 거래 무역업자 등 정부를 지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정부와 협의도 없이 관동군이 대형 사고를 친 것이다. 게다가 조선 주둔 일본군은 군 통수권자인 일왕의 명령도 없이, 정부에 대한 통고도 없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 진주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관동군의 폭주에 대해 정부는 아무런 손도 못 쓰고 추인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6년 후 터진 중일전쟁 역시 현지 일본군의 도발에 도쿄 정부가 끌려가는 형태로 발발하고 말았다. 무책임의 극치다.
국제연맹 경고하자 연맹 탈퇴
중국의 실력자 장제스(蔣介石)가 취약한 권력 기반 및 공산당과의 내전 때문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사이, 관동군은 진저우(錦州)를 폭격하고, 하얼빈(哈爾濱)을 장악한 후 1932년 3월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옹립하여 만주국을 세웠다. 국제연맹은 만주사변의 진상을 밝힌 리튼 보고서를 채택하여 일본군의 철수를 요청했으나, 일본군은 오히려 러허(熱河)를 침략하며 국제연맹의 경고를 보란 듯이 무시했다. 그러고는 1933년 3월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만주사변으로 일본 사회는 크게 변화했다. 군인들의 용맹한(?) 도전에 여론은 지지를 보냈다. 러일전쟁 때도 그랬지만 일본 국민들은 대외팽창 노선에 비판적이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영미와의 협조주의를 천명한 워싱턴 체제에 대한 군부의 반감이 점점 국민 속으로 확산되어 갔다. 반면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민주정부는 군부의 도발에 단호한 태도를 보여주지 못하고 질질 끌려 다녔다. 군부에 대해 비판적인 국민들도 이런 정부에는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전회 칼럼에서 쓴 대로 테러와 쿠데타가 빈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더욱 입바른 소리를 내길 꺼리게 됐다. 가장 큰 변화는 전쟁뿐 아니라 정치에 대해서도 군부의 입김이 엄청나게 커졌다는 사실이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주역이라 할 정당, 특히 정우회(政友會)는 거침없이 군부에 영합했다. 이제 군부의 의중에 역행하는 정책을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미국-소련, 커지는 日 경계
국제연맹에서 탈퇴하면서 일본은 고립을 자초했다. 조금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영국 미국과의 협조를 중시하라는 메이지 원로들, 특히 이토 히로부미의 충고를 그 후배들은 더 이상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만주를 삼키니 몽골이 필요해졌고, 그마저도 손에 넣자 중국 본토가 탐이 났다. 이미 일본 국력의 한계와 국제 정세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이들 머릿속에 없었다. 그걸 꿰뚫어 보고 있던 일본의 전략가들은 입을 다물었다.
관동군의 참모들이 으스대며 만주벌판을 휘젓고 다니는 사이, 한국과 중국의 전략가 이승만과 쑨커(孫科)는 이 얼치기들의 전쟁놀이를 쓴웃음 지으며 주시하고 있었다. 중국의 입법원장 쑨커는 스탈린이 추진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완성되고, 미국이 해군을 보강하면 일본은 열세에 빠지기 때문에 3∼5년 이내에 미국-소련과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그때 중국에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과 유럽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던 전략가 이승만도 같은 생각이었다. 시기는 쑨커의 예상보다 늦어졌지만, 일본은 결국 미국-소련과 개전하는 최악의 선택을 했고, 한국과 중국은 오랫동안 기다리던 기회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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