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환자 진료를 하다 보면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암에 잘 걸리는 나이가 70대이다 보니 주로 70대 환자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이 세대는 전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후불제 압축적 근대화를 이룬 세대다. 따라잡을 선진국을 정하고 그들을 맹추격하는 것이 생존 전략이었다. 그 과정에서 편법과 요령은 어느 정도 용인되었고 효율성이라는 이름 속에 원칙은 무시되곤 했다. 과정보다 성과가 중요했으므로 ‘빨리빨리’라는 속도와 효율성은 추종했으나 방향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다. 결국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갖춰야 할 자질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채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가 뻗은 검은 그림자만 사회 곳곳에 깊게 드리워진 것은 아닐까.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중·고등학교 때 부모님이 공부하고 1등 해야 한다고 해서 공부했지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느 쪽에 소질이 있는가에 대해서 스스로 질문해본 적도, 스스로 답해본 적도 없다. 속도와 효율성에 대한 집착은 방향에 대한 고민의 부재를 초래한다. 열심히 했는데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이 길이 맞는지 고민하기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채찍질하며 속도를 냈다. 직장인이 되어서도 참 열심히, 그리고 정신없이 살았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열심히 달려온 것뿐인데, 갑자기 암에 걸렸다고 하면, 눈앞에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낭떠러지에 맞닥뜨리면 멈춰야 하지만 속도가 빠를수록 관성이 붙어서 잘 멈춰지지 않는다. 그래서 빠르게 달려온 사람은 위기가 올 때 멈추기가 어렵다. 그냥 추락하기 쉽다. 그래서 열심히 산 사람일수록 암과 같은 위기를 만나면 삶의 속도를 늦추기도, 멈추기도 쉽지 않아서 갑자기 ‘멘붕’에 빠진다. 너무 빨리, 열심히 달려온 대가는 대개 참혹하다.
살면서 암에 걸리는 일은 분명 낭떠러지를 만나는 것 같은 위기다. 위기의 순간에는 살아온 관성을 버리고 속도를 늦춰야 한다.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 운전할 때도 안개가 끼면 속도를 줄이지 않는가. 속도를 늦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 맞는지 고민해야 한다.
잘못된 방향일수록 빨리 달리면 나중에 되돌아올 때 더 많이 돌아야 한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제대로 온 것이 맞는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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