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창업한 스타트업 A사는 창업 이전부터 사업 자금을 대고 싶다는 투자자들이 줄을 섰다. 생산자들과 직거래로 유통마진을 제거해 공동구매 플랫폼을 만든다는 A사 계획이 투자자들의 구미를 당기게 했기 때문이다. 실제 창업 이후 얼마 되지 않아 A사는 월 거래액이 수십억 원을 넘기고, 회원 수는 100만 명을 돌파했다. A사의 투자 유치 담당자들은 벤처캐피털(VC) 관계자들을 시간을 쪼개서 골라가며 만났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A사 투자 담당자들은 돈을 쥐고 있는 기관 관계자들에게 투자해 달라고 읍소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A사 관계자는 “이전에는 투자자들이 먼저 연락을 해서 ‘뭘 해주면 되겠느냐’고 묻곤 했지만 지금은 우리가 전화를 해도 잘 받지 않는다”고 푸념했다. 》
글로벌 경기 침체와 각국의 금리 인상으로 최근 신생 기업들의 투자 유치가 부쩍 어려워졌다. 증시에서 투자금을 직접 모집하는 기업공개(IPO) 시장에도 찬바람이 불고 있다. 먼저 상장을 마친 스타트업 기업들의 주가도 고꾸라지고, 비상장 시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스타트업도 된서리를 맞고 있다. ‘투자 빙하기’가 장기화되면서 스타트업들의 ‘옥석 가리기’와 산업 개편이 앞당겨질 조짐이다.
○ 금리 상승에 스타트업 자금조달 찬바람
스타트업의 투자 시장이 꽁꽁 얼어붙고 있다는 점은 모태 펀드의 회수 규모 추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부는 중소·벤처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벤처캐피털에 예산을 출자한다. 그런데 이 돈이 스타트업에 투자됐다가 정상적으로 회수되는 규모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스타트업 경영난과 유동성 경색이 주된 원인이다.
중소벤처기업부 소관 공공기관인 한국벤처투자 통계에 따르면 모태 출자펀드의 회수금액은 지난해 1분기(1∼3월) 9046억 원이었지만 올해 1분기에는 4526억 원으로 절반가량에 머물렀다. 회수 규모는 1분기 기준으로 2019년부터 매년 급성장해왔지만 올해 들어서 격감한 것이다.
중·대형 스타트업들도 자금 조달을 위한 활로가 부족해진 상황이다. 증시 부진으로 IPO가 어려워졌고, 높아진 금리로 회사채 발행도 힘들어진 실정이다. 금융 스타트업 비바리퍼블리카(토스)는 지난해 말만 해도 비상장 시장에서 기업가치가 28조 원을 넘었지만 최근 단행된 제3자 배정 유상증자에선 8조5000억 원으로 20조 원 안팎이나 쪼그라들었다. 투자금 유치에 성공한 토스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토종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왓챠는 최근 자금난을 이기지 못하고, 음악사업 자회사인 블렌딩을 매각하기로 했다. 왓챠는 지난해 영업손실이 248억 원에 달하는 등 자금난을 심하게 겪고 있다.
스타트업 업계의 ‘돈맥경화’는 해외도 마찬가지다. 29일 글로벌 회계·컨설팅 기업인 KPMG에 따르면 올해 2분기(4∼6월)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벤처캐피털의 투자 규모는 약 1202억 달러 수준이다. 지난해 4분기에는 2072억 달러에 달했지만 지금은 규모가 거의 ‘반 토막’이 난 상황이다.
해외의 대표적인 스타트업들도 된서리를 맞는 것은 마찬가지다. 선구매 후결제(BNPL) 업계의 선두 주자인 유럽 핀테크 기업 클라르나는 작년 6월만 해도 456억 달러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으며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신규 자금 조달 과정에서 기업가치가 7분의 1인 67억 달러 수준으로 평가됐다.
○ “당장의 수익 창출 능력이 중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라. 자금 조달에 성공할 가능성이 아주 낮을 것이다. 심지어 회사가 잘되고 있더라도 어려울 것이다.”
세계 최대 액셀러레이터(투자·육성 전문기업)인 와이콤비네이터가 올해 5월 창업자들에게 보낸 메일이다. 요즘 스타트업들은 유동성이 풍부했던 과거 초저금리 시기와는 달리 극심한 보릿고개를 경험하고 있다. 시중금리 상승으로 투자기관들의 기대수익률이 높아진 상황이라 투자자들은 손실 위험이 큰 스타트업 투자를 꺼린다. 벤처캐피털도 관망세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내년에는 상황이 다소 나아질 것으로 예상하고 일단은 기존 투자 계획을 보류하며 시기를 다시 조율 중이다.
투자 빙하기가 길어짐에 따라 살아남을 수 있는 스타트업과 그렇지 못한 곳의 양극화가 곧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과거에는 당장 이익은 나지 않아도 장기적으로 큰 성장 잠재력이 있다면 생존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수익을 낼 수 있는 능력이 필수적인 상황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중견 사모펀드(PEF)의 투자 담당 부대표는 “지금은 잠재력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금 창출 능력이 중요해졌다”며 “스타트업이 휘황찬란한 미사여구로 꿈을 포장해도, 개발비용은 꾸준히 들어가는데 영업손실이 나고 있다면 투자 가치가 없다”고 강조했다. 시중 증권사의 투자 담당자는 “최근의 금리인상 기조는 재무구조가 취약한 스타트업에 ‘독’이 됐다”며 “미래 성장 가능성을 당장 현실화해 성과를 내놓지 않으면 기업가치를 제대로 평가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또 다른 사모펀드 대표는 “이제 스타트업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아야 하는 시기가 도래했다”며 “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스타트업이 속출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당장 기업을 운영해야 하는 스타트업은 이런 상황을 그냥 손놓고 바라볼 수만은 없는 입장이다. 연구개발(R&D)과 인건비 등 운영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투자 유치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업종별로는 플랫폼 비즈니스와 바이오 부문의 스타트업들이 특히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투자업계는 보고 있다. 플랫폼 시장은 이미 쿠팡을 시작으로 경쟁이 치열해진 상황이고, 바이오는 각 임상 단계와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 등 실질적으로 제품 개발에 성공하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 “정부가 나서라” vs “지나친 지원은 좀비기업 양산”
스타트업의 자금 조달이 위기에 처하면서 정부가 이들에 대한 지원 수준을 늘려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중기부의 창업 지원 관련 예산은 8492억 원(2020년 기준)으로, 정부는 이를 활용해 창업 컨설팅과 각종 세제 혜택, 공공 구매제도 도입 등 맞춤형 지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스타트업 업계는 이런 수준으로는 업계의 유동성 위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말한다. 황수민 한국청년스타트업협회 사무처장은 “스타트업은 그 특성상 국가가 마중물을 대고 육성해야 하는 분야라 지금은 국가 주도적인 개입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큰 상황”이라며 “스타트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서 적절한 시점에 정부의 유동성 공급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무차별적이고 과도한 정부 지원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정부의 잘못된 예산 지원으로 경쟁력 없는 스타트업에도 돈이 흘러들어가고, ‘좀비 기업’이 난립하는 부작용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준행 서울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그간 벤처 생태계는 시중에 풀린 유동성과 정부 지원으로 호황을 누렸다”며 “이제는 경쟁력 있는 스타트업에 지원을 집중해 선순환 구조로의 변화가 필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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