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기자는 언제 어떤 현장으로 취재를 갈지 모른다. 수습기자를 갓 마쳤을 때 구두를 신고 회사에 도착하자 바로 북한산으로 향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밤새 기온이 떨어지면서 서울 도심엔 비가 내렸지만, 산에는 눈이 내렸기 때문이다. 아무런 준비 없이 산을 오르는데 비와 섞인 눈이라 구두가 쭉쭉 미끄러졌다. 사진을 다 찍고, 내려올 때는 넘어지기를 여러 번. 등산로 양옆 나무를 잡고 엉금엉금 내려왔다.
산에서 내려온 후 선배들의 캐비닛을 유심히 봤고, 다들 현장에 맞는 복장과 장비를 갖추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출근할 때 신는 구두나 옷과 상관없이 ‘현장용 장비’를 구입했다. 가을 단풍이나 겨울 설산 취재를 위해서는 등산화가 필수이고, 어느 정도 격식을 요하는 현장을 고려한 재킷도 있다. 그리고 호우 취재를 대비한 슬리퍼와 우비도 마련했다.
어느새 나의 회사 캐비닛은 아웃도어 장비들로 채워졌고, 그런 장비들을 사용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동료 사진기자들처럼 나도 움직임이 편한 캐주얼 복장을 선호하게 됐다. 하지만, 그런 기자들도 드레스코드를 갖추는 곳이 있다. 바로 대통령실이다. 불편한 움직임을 감수하고, 대통령을 기록한다는 자부심으로 격식에 맞는 복장을 갖추고 취재한다. 이런 관례는 청와대 시절부터 이어지고 있다. 현재 대통령실을 취재하는 후배는 출입 기자로 지정된 후 정장을 새로 장만하기도 했다.
실제 외국에서는 복장을 예의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프랑스 칸 영화제는 드레스코드가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레드카펫을 밟는 배우나 감독뿐 아니라 남자 사진기자나 영상기자의 경우 검은 정장에 끈 달린 검정 구두, 나비넥타이를 갖춰야 취재가 가능하다.
8일 밤 서울에 115년 만의 기록적인 비가 내렸다. 강남과 동작구, 관악구 등에서 침수 피해가 발생했고, 사망자가 나오는 등의 상황이 일어났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튿날 사망사고가 발생한 신림동 반지하 건물을 찾았다. 당시 윤 대통령은 검은색 구두를 신고 있었다. 동행한 오세훈 서울시장과 소방재난본부장은 등산화를 착용했고, 또 다른 수행원은 장화를 신고 있었다. 사진기자 눈에 검정 구두가 띄지 않을 수 없었다. 일반적인 수해 현장에서는 운동화나 등산화 또는 장화가 일종의 드레스코드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날에도 윤 대통령은 폭우로 옹벽이 무너진 동작구의 아파트 단지를 방문했다. 이날도 검정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리고 오후에는 흙 자국이 남아있는 신발을 그대로 신고 경찰청장 임명장 수여식에 참석했다.
윤 대통령은 평소 딱딱한 정장용 구두보다는 끈이 없는 캐주얼 구두를 신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옛날 사진을 찾아봤다. 과거 문재인 대통령에게서 검찰총장 임명장을 받던 날도 캐주얼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리고 올해 5월 대통령 취임식 날도 마찬가지였다. 몇 년 동안 언론에 찍힌 사진에서 윤 대통령이 유일하게 끈 달린 정장용 구두를 신은 사진은 올 5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날뿐이었다. 당시 결혼식 때 장만한 구두를 광까지 내서 바이든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구두가 너무 깨끗하다. 나도 구두를 더 닦고 올걸 그랬다”는 환담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어찌 보면 소탈하고 격식 없는 모습이라 생각할 수도 있고,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 캐주얼 구두를 고집할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통령으로서 상황에 맞는 복장을 입는 것은 마땅히 지켜야 할 일일 수도 있다. 국민들도 수해 현장에서는 장화를 신고 소매를 걷어붙인 대통령이 더 익숙하다.
대통령으로서 정상 간 만남을 가질 때나 장차관 등에게 임명장을 수여할 때는 반짝이는 정장용 구두가 품위 있어 보인다. 산불이나 수해 같은 재해 현장을 방문할 때는 기성 정치인들처럼 운동화나 등산화를 신는 게 자연스럽다.
수해 현장 구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의식한 듯 윤 대통령은 지난주 빗물터널을 방문하면서 새 장화를 신었다. 보통 정치인이나 고위관료의 현장 방문에는 비서진 등이 준비한 새 장비들이 사용되곤 한다. 일회용처럼 한 번 쓰고 방치되는 그런 것들보다는 이번 기회에 대통령도 상황에 맞는 다양한 신발들을 구비해 두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대통령의 신발이 논란이 되는 일이 없게 ‘슈즈코드’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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