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그제 ‘긴급조치 9호’ 피해자들이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긴급조치 9호의 발령부터 적용·집행에 이르는 국가 작용은 전체적으로 위법하다”며 국가의 배상 책임이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197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긴급조치 9호를 제정한 지 47년 만에 그 잔재를 청산할 길이 열린 것이다. 주심인 김재형 대법관은 “우리 사회가 긴급조치 9호로 발생한 불행한 역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긴급조치 9호는 집회와 시위, 신문, 방송을 통해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행위 등을 포괄적으로 금지했다. 이를 어기면 영장 없이 체포·구금됐고 형량도 가혹했다. 유신 반대 시위를 한 대학생들이 줄줄이 구속돼 징역형을 받았고 심지어 버스 안에서 유신헌법을 비판한 한 시민이 3년간 옥살이를 하는 일까지 있었다. 긴급조치 9호의 피해자는 1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유신헌법에도 명시됐던 영장주의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는 긴급조치 9호로 무력화됐다.
대법원은 2013년 긴급조치 9호가 위헌이라고 결정했으면서도 2015년에는 국가가 배상할 책임은 없다고 판결했다. 긴급조치를 발령한 것 자체가 공무원의 고의·과실에 의한 불법행위는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법조계에서는 재심을 통해 긴급조치 위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더라도 피해를 배상받지 못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당시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문건에 2015년 판결이 ‘국정운영 협력 사례’로 포함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재판 거래’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7년 만에 판례가 변경됐지만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이미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가 확정된 190여 명은 배상을 받기 어렵다. 이번 판결의 효력은 소급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오랜 세월 고통을 견뎌온 유신의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배상을 받고 일부는 받지 못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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