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재정추계위원회가 8월 30일 첫 회의를 열었다. 5차 재정계산에 착수하기 위해서다. 정부는 국민연금법에 따라 5년마다 연금 기금 소진 시기를 전망하는 추계를 실시한다. 내년 3월 추계 결과가 나오면 개혁안이 마련된다. 이 안이 10월 국회를 통과하면 연금개혁이 이뤄진다. 연금개혁은 윤석열 정부의 주요 국정과제다.
4차 재정추계(2018년)에서 국민연금은 고령화·저출산 탓에 2057년 기금이 바닥날 것으로 예측됐다. 2018년 0.98명이던 합계출산율은 올해 2분기 0.75명까지 떨어졌다.
절박하다. 하지만 ‘예언’부터 하겠다. 추계위는 ‘2055년 기금이 고갈된다’는 결과를 내년 3월 발표한다. ‘이번에는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사회 전반에 확산된다. 분위기에 맞춰 국민연금 개혁안도 발표된다.
그러면 묘하게 분위기가 바뀐다. ‘개혁의 필요성’보다는 ‘개혁안의 문제점’을 다룬 보도가 쏟아진다. 개혁안에 각계 요구에 맞춘 예외 조항들이 덕지덕지 붙는다. ‘삶도 팍팍한데, 보험료까지 오르냐’는 여론까지 커지면 대통령은 “국민 뜻을 거스르지 않겠다”고 천명한다.
그간 연금개혁은 SF영화 속 ‘타임루프(Time Loop)’에 빠진 주인공과 비슷했다. 특정 시간대에 갇혀 비슷한 일을 반복해 왔다는 의미다. 2018년 4차 추계 발표 후 연금 보험료를 현행 9%에서 11∼13%로 올리는 개편안이 마련됐다. 여론이 악화되자 문재인 전 대통령은 “국민연금의 주인은 국민”이라며 수습에 나섰다. 2013년 3차 추계 때도 보험료를 14% 올리는 안이 백지화됐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타임루프 원인을 찾아내 ‘무한반복 저주’에서 벗어난다.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주인공 톰 크루즈는 타임루프를 발생시키는 외계 생명체를 파괴했다. ‘시간의 반복’에 좌절하지 않는 주인공의 강한 의지가 사건 해결의 중요 변수가 된다.
기자가 파리 특파원으로 근무하는 동안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연금 타임루프’를 깨려는 주인공이었다. 프랑스는 매년 연금 적자가 100억 유로(약 13조 원) 발생한다. 마크롱이 2019년 연금개혁을 추진하자 대중교통 종사자 총파업이 일어나 나라가 마비됐다. 마크롱은 올해 4월 대선을 앞두고, 공약으로 다시 연금개혁 카드를 꺼냈다.
‘남의 나라’ 대통령을 칭찬하려는 건 아니다. 최고 지도자의 의지가 강해도 연금개혁이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보건복지부 내부에서는 이미 ‘이번 정권에서도 연금개혁은 어렵다’는 자조가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은 30% 언저리다. 대통령 공약과 달리 연금개혁은 대통령 직속기구가 아닌 국회 연금특위가 담당하게 됐다. 특위 활동은 내년 4월이면 끝난다.
답은 정해져 있다. 지금보다 더 내거나 덜 받는 게 유일한 해법이다. 국민연금 보험료율은 1988년 3%, 1993년 6%, 1998년 9%로 오른 이래 24년째 그대로다. 어떤 개혁안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연금개혁을 꼭 이루겠다는 지도자 의지부터 선행돼야 한다. 지지율 하락을 겪을지라도 ‘역사가 평가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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