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일본의 친정집에서 만 88세 된 어머니가 미리 주문한 ‘비빔밥 세트(ビビンバ정セット)’를 꺼내며 말했다. 나는 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2년 반 만에 왔는데 한국 음식?”이라고 투덜댔다.
만드는 방법은 너무 간단했다. 그릇에 먼저 준비한 밥을 담고, 그 위에 각각 포장된 시금치, 숙주나물, 고사리와 무나물을 얹고, 그 가운데에 반숙달걀과 고기양념, 고추장을 놓아 완성했다.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맛은 놀라웠다. 부드럽고, 적절히 간이 된 나물과 반숙달걀, 고기양념이 어우러져 기대 이상이었다. 2인분에 한국 돈 6000원가량으로 가격도 착해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제 일본 편의점에 가면 일본 라면 옆에 여러 종류의 한국 라면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더 놀라웠던 것은 규슈(九州) 친정집 근처의 대형마트에는 ‘국제시장’이라는 한국 식품의 프랜차이즈점이 입주해 있다는 점이다. 김, 각종 음료수와 과자는 물론이고 인스턴트 면은 아주 다양해 최신 상품을 비롯해 30여 종류가 있었던 것 같다. 또한 냉동식품, 삼계탕, 진공 포장된 순대나 족발 등 다양한 한국 식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옆에는 한국 치킨집도 있었다.
이렇게 한국 식품점포가 몇 년 사이 일본 전국에 늘어나고 있다. 온라인 매장의 상품은 더 다양해 한마디로 없는 게 없었다. 한 온라인 매장에서는 25가지 라면을 무작위로 골라 하나의 세트로 팔고 있어 인기가 높았다. 이제 일본에서는 맛있고 다양한 한국 식품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됐다.
일본에서 한국 식품의 소비자가 한류 이전에는 거의 한국인이었고, 한국 요리라 하면 불고기, 비빔밥, 국밥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2003년경으로 드라마 ‘겨울 연가’의 인기가 한국 음식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특히 2005년 사극 드라마 ‘대장금’이 NHK에서 방송되며 그동안 서민적 이미지의 한국 요리에 ‘고급스럽고 심오한’ 이미지가 더해졌다.
2010년부터는 케이팝이 유행했고, 2016년 겨울경부터 Z세대를 중심으로 ‘한국 스타일(韓國っぽ)’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한마디로 한국적인 것이 ‘귀엽고 멋진’ 것으로 인식됐다. 치킨, 특히 양념치킨, 치즈닭갈비, 치즈핫도그가 인기를 끌었다. 한국 음식 사진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용으로 각광받았다.
최근 코로나로 또 변화가 왔다. 한일 간 왕래가 어려워진 것이다. 홋카이도에 거주하는 한국 영화 전문기자 H 씨에 의하면 2020년 중반부터 한국 식품을 취급하는 업소가 급속도로 늘어났다고 한다. 일본에서 여행사를 운영했던 교포들이 코로나로 타격을 받자 한국 식품 수입, 판매를 시작했다고 한다.
많은 직장인들이 재택근무에 들어가며 넷플릭스를 비롯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즐겼고, ‘사랑의 불시착’ ‘이태원 클라쓰’ ‘음식프로’ 등 한국 콘텐츠가 큰 인기를 끌게 된다. 더불어 한국 식품 수요도 증가했다. 한국 문화를 즐기는 색다른 방법으로 ‘한국여행놀이(도한놀이·渡韓ごっこ)’와 ‘도칸스(도한놀이+호캉스·호텔에서 한국으로 바캉스 간 모습을 연출해 사진을 찍으며 즐기는 것)’ 등도 등장했다.
일본에 다녀온 후 난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일본에 가기 전 현지 제자에게 “먹고 싶은 것이 뭐야? 뭐 사다 줄까?”라고 물으니 “다 있으니 안 가져오셔도 돼요”란 말을 들었다. 예의상 대답한 것이라 생각해 적지만 이것저것 사갔는데, 바로 후회하고 말았다. 정말로 가져간 걸 모두 일본에서 쉽게 살 수 있었다. 이제 어떤 한국 선물을 사가면 좋을 것인가? 김이나 과자, 라면 같은 식품은 굳이 가져갈 필요가 없게 됐다.
최근 한국 정부가 일본인 관광객에게 무비자 입국을 10월 말까지 연장하기로 발표했다. 내 주변 지인들은 다 한국에 여행 가고 싶어 한다. ‘한국여행놀이’나 ‘도칸스’를 즐겼던 세대들은 이제 진짜 한국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관광이 정상화되기까지 좀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머지않아 일본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올 것이다. 이 관광객들의 눈과 입이 즐거웠으면 한다. “역시 본고장이야”라고 느끼게끔 새로운 아이디어와 따뜻한 정(情)으로 이들을 친절하게 맞이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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