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유성열]유가족의 슬픔엔 시간표가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9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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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열 사회부 차장
유성열 사회부 차장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제복 공무원 유가족들의 고통과 현재, 그리고 미국의 보훈 시스템을 다룬 ‘산화,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을 지난달 8∼13일 보도했다. 며칠 전 팀원과 팀장, 데스크가 저녁을 먹으며 시리즈 후기와 반응을 공유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팀장이 급히 나가 전화를 받았다. 10분 이상 통화를 하고 돌아온 팀장은 웃으며 말했다.

“박현숙 씨예요. 가끔 이렇게 먼저 전화를 주시네요.”

박 씨의 남편 허승민 소방위는 2016년 5월 강원 태백 강풍 피해 현장을 수습하다 머리를 다쳐 세상을 떠났다. 백일 된 딸 소윤이를 남긴 채였다. 박 씨는 그저 평범하게 딸을 키우고 싶어 눈물을 꾹 참고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내보려 했다. 하지만 끝내 곪은 눈물이 덧나고 공황장애까지 겪으며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히어로콘텐츠팀은 박 씨와 같은 ‘남겨진 사람들’을 5개월간 취재했고, 그 결과물이 이번 시리즈였다.

그날 팀장이 박 씨의 전화를 받았다고 했을 때 ‘grief knows no schedule’이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미국의 군 유가족 지원 비영리기관인 ‘TAPS(Tragedy Assistance Program for Survivors)’는 유족이 언제든지 상담을 받을 수 있는 ‘헬프라인’을 24시간 운영하는 이유를 이 문구로 설명한다. 유가족들이 겪는 슬픔은 시간표가 없기 때문에 언제든 찾아올 수 있고, 그래서 24시간 지원해야 한다는 취지다.

TAPS는 ‘동반자적 연대’라는 원칙 아래 순직 군인 유가족으로 구성된 ‘돌봄 전담팀’도 운영한다. 유사한 경험을 한 사람들끼리 슬픔을 나누고 돕도록 하는 게 심리 안정에 가장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에 따른 것이다. 다른 유족을 돕고 싶은 유족은 순직 1년 후부터 일정한 교육과 훈련을 받은 뒤 돌봄 전담팀에 합류할 수 있다.

국내엔 이런 시스템이 전무하다. 먼저 TAPS와 같은 유족 지원 전문단체가 없다. 사단법인 성격의 유족회가 있지만 예산과 인력이 턱없이 부족해 ‘24시간 헬프라인’은 꿈도 꾸지 못한다. 순직소방공무원추모기념회의 연간 예산은 1억 원 안팎인 반면 전미순직소방관재단(NFFF)은 매년 100억 원을 유족 지원에 쓴다.

만약 국내에도 유족들을 위한 헬프라인이 있었다면, 순직 사고 발생 직후부터 TAPS의 ‘돌봄 전담팀’과 같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면 박 씨는 본인이 원했던 대로 ‘아무렇지 않게’ 지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팀장과의 통화에서 박 씨는 다른 유족들을 도울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만약 TAPS처럼 ‘돌봄 전담팀’을 운영하는 유족 지원 전문단체가 국내에도 있었다면 박 씨는 그 누구보다 앞장섰을 것이다.

유가족들의 ‘선택권’은 지금보다 넓어져야 한다. 상담이 필요할 땐 24시간 전문가와 통화할 수 있고, 다른 유족을 돕고 싶을 땐 마음껏 도울 수 있는 선택권. 그리고 그 선택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전문단체. ‘일류 보훈’을 추구한다는 현 정부가 깊이 고민할 대목이다.
#유가족#슬픔#돌봄전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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