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지인이 책을 썼다며 내게 추천사를 부탁했다. 지인은 나보다 열 살쯤 어리다. 세련된 염소수염을 기르고 통 넓은 바지를 입는 등 옷차림도 멋지다. 승낙하고 책을 읽었다. 사람들이 ‘취향’이라 부르는 개인적 기호에 대한 이야기였다. 처음부터 아주 눈에 띄는 구절이 있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나 건강한 자기 직시 같은 거 말고, 낭만이니 감성이니 하는 것들로 그냥 달콤하게 눈을 가리고 싶을 때가 다들 있지 않나.’
달콤하게 눈 가리기. 내가 젊은이들을 보며 느낀 걸 요약하는 말이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 취미가 오마카세 식당 가기와 LP 수집”이라는 말도 두 번쯤 들었다. 둘 다 값비싼 취미인데도. 서점에 가면 나를 위로해주는 책들, “당신은 잘못이 없다”고 말해주는 에세이들이 가득하다. 고금리 시대가 찾아와 생활물가가 오르고 집값은 떨어지지 않으며 인간의 일자리가 줄어들고 세계가 신냉전시대로 들어가는 현실은 달콤한 눈가림 앞에서 다 녹아내리는 듯 보인다.
젊은이들의 눈가림식 소비는 실제로 구현 가능하다. 한국이 선진국화한 덕이다. 최저임금이 올랐는데 혼인율과 출산율은 줄었다. 집을 사지 않고 아이가 없어도 된다면 내가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가처분소득은 역으로 늘어난다. 최저임금도 상승했으니 (젊으므로) 몸이 건강해서 의료비 걱정이 없고 저축을 하지 않을 거라면 적당한 일을 하면서도 대도시의 월세를 감당하며 멋진 삶을 살 수 있다. 지난주 서울 은평구의 어느 식당 앞에서 수습 직원 월급이 270만 원이라는 공고를 봤다. 나는 그 정도 액수면 충분히 살 수 있다.
그에 호응하듯 취미와 사치품 관련 소비시장은 차원이 달라질 정도로 발전했다. 나는 라이프스타일 잡지계에서 일해 왔으므로 이 부분을 피부로 느낀다. 골프의 대중화는 물론이고 테니스에서 승마에 이르기까지, 한국인들은 이미 서양 중산층 이상의 취미를 능숙하게 즐긴다. 나의 주 담당 분야 중 하나는 고가 시계다. 내가 처음 시계를 담당하던 11년 전에는 하나에 5000만 원씩 하는 초고가 시계 브랜드 매장이 내수 시장에는 있지도 않았다. 요즘은 정보기술(IT) 대기업 대표나 20대 래퍼 같은 사람들도 그 브랜드 시계를 차고 공식 석상에 나선다.
젊은이들의 저출산에 대한 여러 추측이 있다. 집값이 비싸서. 경쟁이 치열해서. 젠더 갈등이 심해서. 그건 모두 원인이 아닌 관련 지표다. 근본 원인은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좋은 미래가 새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20세기에는 선명히 그려지는 꿈이 있었다. 산업화든 민주화든 ‘부자 되세요’든, 그 꿈이 이루어지면 나와 내 자손에게 더 나은 삶이 온다는 약속이 있었다. 약속의 전제는 미래다. 지금은 누구도 좋은 미래를 그려 주지 못한다. 미래가 보이지 않으니 현재의 고통을 참을 이유가 없고,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나려 눈을 가린다.
나는 이 책이 잘될 것 같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표현처럼 달콤한 뭔가에 잠깐 눈을 돌리고 산다. 지인의 책은 그런 삶의 충실한 기록이니 공감을 얻을 것이다. 다만 이 젊은이들이 더 이상 달콤한 눈가리개를 쓸 수 없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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