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을 넘긴 나이에 어렵사리 과거에 급제한 후 승승장구 재상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시인. 이 시는 그가 과거 시험 책임자로서 공원(貢院·고사장)에 들어갔을 때 느낀 소감을 담벼락에 써 붙인 것이다. 고뇌 속에 시험을 치른 힘겨웠던 경험을 회상하며, 관리로서 공평무사를 맹세했던 그 옛날의 초심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음을 천명한다. 지난날 내가 고사장에 들어섰을 때 정원에는 온통 오동잎이 뒹굴고 굳게 닫힌 고사장 붉은 대문은 더없이 을씨년스럽고 삼엄했지. 그런 분위기에서 답안지를 써내야 했던 긴장과 불안을 이제는 그대들이 고스란히 느끼겠지. 하지만 의기소침해하지 말게. 바로 이 자리에서 내가 그런 고통을 겪었기에 오늘의 지위에 이르렀고 정도(正道)를 가겠다는 초심을 지금껏 간직하고 있다네. 시험 평가의 공정성을 담보한다는 강직함과 더불어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후배들을 보듬겠다는 시인의 속 깊은 격려가 엿보인다.
한데 시인이 남긴 이 ‘격려의 말씀’이 고까웠던지 어느 낙방 거사가 시비 아닌 시비를 걸었다. 1구 7언으로 된 이 시에서 앞의 두 글자를 모두 삭제하여 1구 5언으로 만들어버렸다. 시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뜰 가득 잎 떨어져 을씨년스럽고, 붉은 대문 고사장은 깊기도 해라. 고뇌하며 시험을 치르셨던 이곳, 지금은 그 초심을 저버리셨구려.’ 마지막 구절을 ‘초심을 잃었다’는 정반대의 의미로 비꼰 것이다. 고사장 책임자와 응시자의 입장만큼이나 격려와 비꼼의 심리적 편차가 아득히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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