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해지는 ‘재판 지연’… 민사소송 첫 재판 137일 걸려
“채무 원금보다 지연이자 더 나와”… 형사 1심 기간도 4년만에 1.4배로
신속 재판 받을 권리 침해 우려… 갈수록 사건 복잡하고 다양화
5년만에 검토자료 2.1배로 늘어… “고법부장 승진 폐지, 일 덜해” 지적
《지인에게 빌려준 1000여만 원을 돌려받기 위해 지난해 12월 소송을 제기한 A 씨는 이달 6일에야 첫 재판을 받았다. 이날 열린 첫 재판에 걸린 시간은 불과 5분. A 씨는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제 사건은 복잡하지도 않고 소장도 1장에 불과하다. 그런데 소송을 낸 지 9개월 만에,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때가 돼서야 첫 재판이 열렸다”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법원과 변호사 업계 등에서 최근 재판 지연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더딘 재판 진행으로 헌법 27조 3항에 보장된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침해되고 있다는 것이다. 오석준 대법관 후보자도 최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재판이 늦어진다는 지적은 저희(법원)가 뼈저리게 반성해야 될 부분”이라고 했다. 다만 재판 지연의 원인과 대책에 대해선 법원 안팎의 온도 차가 여전한 상황이다.》
○ 형사 1심 기간, 4년 만에 1.4배로 늘어
지난해 기준으로 법원에 민사 소송을 제기한 뒤 첫 재판을 받는 데 걸리는 기간은 평균 137일이다. 최소 넉 달은 지나야 판사 얼굴을 처음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민사 항소심의 경우는 항소 제기 이후 첫 재판까지 190일이 걸려 1심보다 더 길었다. 2017년과 비교해 보면 1심은 20일, 항소심은 63일 늘었다. 한 대형 로펌 소속 변호사는 “(137일 걸린다는) 법원 통계는 단순한 소액 사건까지 포함된 것”이라며 “실제로 맡고 있는 사건 중에는 첫 재판까지 1년 넘게 걸린 사건이 수두룩하다. 2020년 초에 접수해 (2년 넘게 지난) 올봄에야 첫 재판이 열린 사건도 있다”고 밝혔다.
재판을 통해 소송이 마무리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도 증가 추세다. 지난해 민사 1심 합의 사건은 평균 364일, 단독 사건은 226일이 소요됐다. 4년 전과 비교하면 각각 71일, 22일 늘었다. 형사 재판도 마찬가지다. 형사 1심 기간은 2017년 평균 127일이 걸렸지만 지난해에는 176일로 늘었다. 4년 만에 재판 기간이 40%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재판이 길어지면서 지연된 분쟁 해결은 소송 당사자들에게 고통으로 돌아온다. 한 중소형 로펌 소속 변호사는 “몇 년 동안 소송을 하다 보면 당사자들끼리 감정은 상할 대로 상하고 피해 회복도 더 어려워진다”며 “특히 민사 소송의 경우 소송이 길어지면서 채무 원금보다 지연손해금(이자)이 더 나와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경우도 나오고 있다”고 했다.
○ “동기부여 약화되고 판단 어려운 사건 늘어”
대한변호사협회가 최근 소속 변호사들을 상대로 ‘재판 지연’ 경험을 물은 결과 응답자 666명 중 592명(89.0%)이 ‘최근 5년간 재판 지연을 겪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주관식으로 물은 재판 지연의 원인으로는 ‘법원 인력 부족’과 ‘업무 과중’이 꼽혔다. 일부 변호사는 ‘판사 의지 부족, 불성실’ ‘판사 사기 저하’ 등을 이유로 들었다.
한편 법원의 경우 ‘인력 부족’이 재판 지연의 주된 이유라는 입장이다. 법관 수와 사건 수는 비슷한데 인력이 부족해 재판 기간이 길어지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사건의 복잡화·다양화’가 한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사법정책연구원의 ‘법관 업무 부담 및 그 영향요인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재판부에서 사건당 평균 자료 분량은 2014년 176.6쪽(A4용지 기준)에서 2019년 377.0쪽으로 늘었다. 5년 만에 검토할 자료가 2.1배로 늘어난 것이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기업 사건의 경우 갈수록 복잡해지고 전문성을 요하는 사건이 많아지는 추세”라며 “사건이 양적으로 늘지 않아도 질적으로 난이도가 올라가면 심리가 길어질 여지가 크다”고 밝혔다.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하는 상황에서 증거 자료 분량이 늘면 재판 횟수와 소요 시간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법조계 일각에선 판사들의 업무 동기부여 약화 및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중시 경향도 원인으로 꼽는다. 판사들이 과거처럼 야근을 불사하며 사건 처리에 매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20년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가 폐지되면서 업무 유인이 약화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수도권 법원의 한 판사는 “고법 부장 승진제가 있을 때는 승진을 앞둔 판사들이 경쟁적으로 사건을 빨리 처리했다”고 설명했다.
○ ‘판사 증원’ 논의는 제자리걸음
법원은 사건 적체가 심한 민사 합의부의 사건 부담을 줄이기 위해 올 3월부터 합의부 사무 관할을 소송금액 기준 ‘2억 원 초과’에서 ‘5억 원 초과’로 올렸다. 판사 3명으로 구성된 합의부 사건을 줄이고 판사 1명인 단독 재판부를 늘려 재판 진행 속도를 높이겠다는 것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인사 이동으로 재판부가 바뀌면 새 사건 파악에 시간이 걸리는 만큼 사무 분담 장기화, 전문 법관 확대 등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직 판사 상당수는 ‘판사 증원’이라는 근본 대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주요 선진국과 비교하면 한국이 인구수 대비 판사 수는 적은 반면 판사 1인당 사건 수는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문제는 법원의 법관 증원 요구가 국회와 정부로부터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관계자는 “현 정부 들어 공무원 감축 기조가 강한 상황인데 법원만 조직을 키우는 건 쉽지 않을 것”이라며 “국회에선 왜 판사 증원이 필요한지 공감대조차 형성되지 않은 단계”라고 했다.
판사 증원에 앞서 ‘판사 정원’ 문제를 국회에서 먼저 풀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판사 정원은 ‘각급 법원 판사 정원법(판사정원법)’에 규정돼 있는데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포함해 3228명, 현재 인원은 3040명이다. 지난달 대법원이 발표한 신임 법관 임용 대상자 136명이 전부 임용될 경우 남은 정원은 52명에 불과하다. 판사 정원이 이대로 유지되고 내년에 법원 내 사직자가 없다고 가정하면 내년에는 신임 법관을 52명밖에 못 뽑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판사 출신인 더불어민주당 이탄희 최기상 의원 등이 판사 정원을 2026년까지 1000명 증원하는 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 논의는 답보 상태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재판 지연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도 우리나라에 필요한 적정한 판사 규모에 대한 논의가 공론화될 필요가 있다”면서 “법원 내부적으로도 신속한 재판 진행을 위한 자정 노력을 선행해야 국회와 여론의 공감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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