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말경이었다. 워싱턴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필자는 박근혜 당시 대통령과 관련해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대통령이 뉴욕 유엔총회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서울에서 타고 온 전용기가 뉴욕 공항에 없다는 것이다. 전용기는 자동차로 4시간 남쪽에 있는 워싱턴 인근 공항에 옮겨져 있었다. 대통령이 귀국하려면 전용기를 불러야 할 판이었다. 어떻게 동맹국인 한국을 이렇게 취급했을까. 알고 보니 지역 공항 당국 규정에 따른 것이었다. 뉴욕·뉴저지 항만공사(Port Authority of New York and New Jersey)는 공항 규정 38페이지에서 ‘혼잡하다’(high volume of traffic)는 이유로 JFK 등 역내 공항에 도착한 외국 군용기와 외국 정부 비행기는 착륙 2시간 이내에 공항을 떠나도록(required to depart within two hours of arrival) 규정하고 있다.
오래전 일이 떠오른 것은 윤석열 대통령이 20일 유엔총회에 참석하러 뉴욕으로 첫 미국 순방길에 오르기 때문이다. 앞서 대통령 전용기를 옮기도록 한 규정은 2009년 8월부터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 때도 적용됐다는 것이고, 규정이 바뀌지 않는다면 윤 대통령도 뉴욕에 내린 뒤 전용기를 잠시 다른 지역으로 보낼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해 한 외교 소식통은 “한국에만 적용됐던 것도 아니고 전용기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덜 붐비는 가까운 지역으로 보내는 게 오히려 안전하다”고 했다.
이 소식통 말대로 전용기 이동 건으로 양국 간 마찰이 공개적으로 드러난 적은 없다. 다만 필자는 윤 대통령이 이번 뉴욕 방문을 계기로 ‘USA의 본질’을 제대로 느꼈으면 하는 것이다. 윤 대통령의 심정은 5월이나 6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을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다를 수 있다. 5월 정상회담에선 글로벌 포괄적 전략 동맹에 합의했고 6월엔 한국 정상으로는 처음으로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문재인 정부 때 삐걱거렸던 한미동맹이 금세 복원될 것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이후 바이든 정부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밀어붙여 현대차 등 우리 기업에 비상이 걸렸다. 윤 대통령은 바이든 속내가 뭔지 궁금할 것이다.
하지만 차분히 보면 별로 헷갈릴 건 없다. 우리가 5월 한미 정상회담 후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려서 그렇지, 미국은 제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전용기 이동 조치처럼 크든 작든 무엇이든 하는 나라다. 다른 나라도 비슷하다고? 인디언을 몰아내고, 독립을 위해 영국과 혈투를 치르고, 지금은 중국과 패권경쟁 중인 미국은 그 차원이 다르다. 진보 보수 간 이견도 크게 없다. 혹자들은 도널드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 이후 이런 현상이 가속화됐다고 하지만 이전 버락 오바마도 미국의 이익을 지킨다는 목표는 같았다. 중국을 봉쇄하겠다고 만든 오바마의 ‘피벗 투 아시아(Pivot to Asia)’는 트럼프의 ‘인도·태평양’ 개념으로 변형·확대됐고, 바이든은 이를 이어받아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까지 만들었다. IRA 등을 놓고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일시적 현상이라는 관측은 그래서 단견에 가깝다.
윤 대통령이 취임 후 유독 강조하는 인권 자유 민주주의가 미국의 전부는 아니다. 임기 초에 슈퍼파워로서 미국의 실존적 본질과 그것이 한국에 미칠 영향을 파악한다면 대외정책 수립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한미동맹 복원만큼이나 미국을 제대로 아는 것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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