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위의 조선국에 새까맣게 먹을 칠하며 가을바람을 듣는다.” 1910년 8월 한국 병합으로 조선이 사라진 직후,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1886∼1912)는 쓸쓸한 어조로 단가(短歌)를 읊었다. 고색창연한 왕국 조선의 운명(殞命)이 24세의 젊은 시인에게는 가을바람처럼 처연했나 보다. 그러나 이런 일본인은 예외적이었다. 위로는 정치가로부터 아래로는 밑바닥 서민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일본인은 조선의 식민지화를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그 기쁨은 한 세대를 가지 못했고, 일본 제국은 역사 속에 사라졌다. ‘식민지 조선’은 일본 제국에 과연 무엇이었던가.》
근대적 국가로 성장했던 조선
‘식민지 조선’은 여러모로 특이했다. 먼저 조선은 일본의 이웃 나라였다. 서양 국가들도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갖고 있었지만, 바로 옆 나라를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영국과 아일랜드 관계가 예외라고 할 만하나, 그건 수백 년에 걸친 침략의 결과물이었다. 게다가 영국은 한국 합병 11년 후인 1921년 아일랜드 독립 운동가들과 조약을 맺어 이웃 나라의 식민지화를 단념했다. 일본이 아일랜드의 반영투쟁과 독립을 미리 봤다면, 한국 병합이라는 무리수는 피했으려나? 게다가 조선은 천 년 이상 독자적인 왕국을 유지해 온 나라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은 한사군(漢四郡) 이래 중국에 종속되어 온 나라라고 강변했지만, 자기들끼리는 조선을 가리켜 ‘천 년 이상 오래된 왕국’, ‘자존심이 세고 위아래를 모르는 민족’ 운운한 걸 보면 조선이 독자적인 국가였다는 걸 내심 인정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게다가 한국 합병 당시 대한제국은 다른 식민지들과는 달리 어엿한 국기(태극기)도 갖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구한말 정치집회 장면을 보면 갓 쓰고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대형 태극기 아래 모여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이미 ‘백성(인민)’이라기보다는 ‘국민’이었다. 대한제국은 1876년 일본, 1882년 미국과 조약을 맺은 이래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청나라 등 11개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1896년 니콜라이 2세 러시아 차르의 즉위식에는 국가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일본, 미국, 중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에 외교관도 주재하고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1880년대 이후 약 30년간 한국인들은 본격적으로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민족’을 얘기하는 수많은 언론과 학교가 생겨났고, ‘국사’나 ‘국어’에 관한 책들도 읽히기 시작했다. 신채호의 ‘독사신론(讀史新論)·(1908년)’ 저술이나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1909년)은 그런 분위기의 정점이다.
日, 서구의 ‘비식민지화’에 역행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식민지가 되기 전, 이미 이런 상태에 도달한 경우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인도가 인도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상태였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가 지배하는 영역에 따라 국경이 형성되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선 긋기에 따라 국경과 ‘나라’가 만들어진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요컨대 조선은 식민지가 되기 전 20∼30년 동안 민족주의 세례를 듬뿍 받아, 식민지가 되기에는 이미 ‘너무 커버린’ 상태였다. 일본은 인구와 국토 면적에서 자국의 거의 반이나 되는 오래된 이웃 국가를, 게다가 이미 민족의식이 왕성해져 있는 나라를 병합했던 것이다. 그 후과(後果)를 염려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단견 중의 단견이었다.
세계사의 흐름으로도 한국 병합은 역주행이었다.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서구열강은 이제 더 이상 종래의 식민지 정책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여러 가지 ‘비식민화(decolonization)’ 조치들을 취해 나간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와 신생 소련의 식민지 포기 선언은 그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들이며, 2차 세계대전 후의 식민지 포기도 길게 보면 그 흐름을 계승한 것이다. 위에서 말한 아일랜드는 1922년 영연방 자치령인 아일랜드자유국으로 자치권을 획득했고, 1919년 영국은 인도인의 정치 참여를 확대한 인도통치법을 시행했다. 1922년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국에서 이탈하여 독립을 획득하였다. 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세계열강은 워싱턴회의에서 중국의 주권과 독립을 약속하는 9개국 조약을 체결했다. 미국 의회는 1916년 필리핀의 자치를 인정했고, 1934년에는 10년 후 독립을 약속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홍종욱 ‘3·1운동과 비식민화’ ‘3·1운동 100년’). 한국 병합은 간발의 차로(?) 이 세계적 흐름에 역행한 것이다. 1905년의 통감부 체제(외교권만 박탈하고 한국 국왕의 통치는 인정)를 유지했더라면, 아마 일본도 이 시기 이 국제적 흐름에 올라타기 쉬웠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병합을 하고 동화를 선언한 마당에, 조선총독부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문화통치’밖에 없었다. 그 알량한 ‘문화통치’도 세계적인 ‘비식민화’ 조류를 간파한 한국인들이 3·1운동을 일으켰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에 크게 놀란 일본인들은 그 후에도 혹여 다시 3·1운동 같은 게 일어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전전긍긍했다.
‘동양 평화’ 구실, 지뢰밭 자초
한국 병합의 구실은 ‘동양의 평화’였다. 한국을 일본이 지배하지 않으면, 한국 정국의 불안은 계속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외세가 개입하여 동양의 평화가, 일본의 안보가 위태로워진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동양 평화의 붕괴와 일본 안보의 동요는 한국 병합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을 차지한 일본은 중국의 정세 변화에 더욱 구속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현해탄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이제는 일본 땅이 된 식민지 조선과 만주 사이에는 압록강밖에 없었다. 중국 문제에 개입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스스로 만든 것이다. 조선을 차지하고 나니 만주가 누구 땅이 될까 불안해졌다. 그 불안증이 희대의 정치코미디 만주사변과 만주국 건국을 낳았다(8월 19일자 본 칼럼 참조). 만주를 차지하고 나니, 소련의 만주 침략이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소련과 싸우자니 중국의 풍부한 자원이 탐이 나 산해관마저 넘어서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사방팔방이 온통 ‘일본의 안보를 위협’하는 지뢰밭이 되어 있었다. 일본 제국에 한국 병합은 무한 팽창의 자동 페달을 밟아버린 사건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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