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그럴지 모르겠지만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술자리에서 보여주는 묘기 한 가지가 있었다. 목젖을 열고 한 번의 목 넘김도 없이 맥주를 입안으로 ‘들이붓는’ 것이다. 맥주가 가득했던 컵이 불과 1∼2초 안에 빈 잔이 돼 버리는 광경에 사람들은 신기해서 말문이 막힌다. 그가 가끔씩 선보인 ‘맥주가 사라지는 마술’의 임팩트는 꽤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요즘 언론에 나오는 발언들을 보면 목 넘김이나 주저함이 없는 그의 성격은 지금도 여전한 것 같다. 이 총재는 올해 5월 임기 첫 기자회견에서 “제가 말이 빠르고 워낙 직접적으로 말하는 스타일이다. 시장은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미리 경고했다. 그는 “인기가 없어도 금리는 올리겠다”, “성장보다 물가가 우선” 같은 꽤나 직설적인 메시지를 시장에 내놨고, 심지어 “금리를 0.25%포인트씩 올릴 것” 같은 구체적인 수치도 주저 없이 제시했다. 이전 총재들이 “경제와 물가 상황을 고려해 적절한 통화 정책을 하겠다”는 식의 이도 저도 아닌 말들만 반복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거침없는 화법이다.
지금까지 거쳐 온 이력도 좌고우면하지 않는 그의 ‘직진 스타일’을 보여준다.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서울대 강단에 선 이 총재는 안정적인 교수직을 박차고 나와 금융위원회 초대 부위원장, 아시아개발은행(ADB) 수석이코노미스트, 국제통화기금(IMF) 아·태국장 등을 지냈다. 일찌감치 ‘천재 경제학자’로 명성을 쌓고 인지도도 높였지만 이에 들뜬 행동을 하거나 뚜렷한 정치적 색채를 보인 적도 없다. 전 정부가 임기 말 임명했지만 현 정부가 딱히 반대할 명분을 찾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성격도 이력도 막힘이 없던 이 총재 앞에는 유례없는 가시밭길이 놓여 있다. 글로벌 강달러로 환율이 1400원 선을 노크하며 고물가를 자극하는 가운데 수출 둔화와 에너지 대란으로 무역적자 행진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 긴축과 공급망 위기, 전쟁 등 해외발 악재의 불똥을 사방에서 맞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은은 금리를 많이 올려 물가를 잡자니 경기침체와 가계부채가 걱정이고, 그렇다고 적게 올리자니 고환율을 악화시킬 수 있어 근심이 깊다. 물론 역대 총재들이 모두 해온 고민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그 강도가 심상치 않다. 지난주 세계은행은 “아주 작은 충격에도 세계 경제가 침체의 나락으로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 상태다.
이 총재는 지금까지 “물가안정 중시”라는 명확한 목소리를 시장에 전달해 왔다. 그러나 고물가·고환율의 충격 못지않게 고금리의 폐해와 부작용이 부각되기 시작한다면 그의 직진 행보에는 황색 신호등이 깜빡일 수밖에 없다. 그때가 되면 이 총재는 “고통을 감내하더라도 우리가 갈 길은 여기”라며 국민과 정치인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아니면 유연성과 융통성을 발휘해 복합위기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제시할 것인가.
이번 위기는 적어도 내년 초까지는 이어질 것으로 관측된다. 당분간은 고물가가 단숨에 사라지거나 시장이 급격히 진정되는 마술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겐 그때까지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잘 버티는 길밖에 없다. 위기 극복을 위한 이 총재의 어깨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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