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계 노벨상인 필즈상 수상(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수학 국가 등급 최고 그룹 승격, 국제수학올림피아드 종합 2위. 올해 한국 수학계는 금자탑이라 할 정도로 눈부신 업적을 쌓았다. 하지만 밑바탕이 돼야 할 초중고교 수학교육은 정반대로 ‘수포자(수학 포기자)’를 넘어 ‘수학의 붕괴’라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 4년마다 필즈상을 수여하는 국제수학연맹(IMU)의 금종해 집행위원(65·고등과학원 교수·대한수학회장)은 “수포자가 양산된 진짜 이유는 나라가 수학을 제대로 가르치는 걸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라가 제대로 가르치는 걸 포기했다고요?
“수학이 어려워서 싫은 학생들은 늘 있어요. 이건 ‘포기’가 아니라 ‘포비아(공포)’예요. 그러면 나라는, 교육자는 어떻게 해야 해요? 학생들이 겁먹지 않고 재미를 느끼며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제공해야 하잖아요. 어렵지만 필요하기 때문에 꼭 배워야 한다고 설득도 하고…. 진짜 수포자는 학생들이 아니라 수학을 제대로 가르치는 걸 포기한 나라예요. 수학이 어렵다고 이 내용, 저 내용 빼면서 정작 학교에서는 쓸데없이 어렵게 가르치니까요.” ―어떤 면에서 쓸데없이 어렵다는 겁니까.
“초등학교에서 분수를 이렇게 가르쳐요. ‘길이가 45cm인 색 테이프를 영훈이와 지연이가 나누어 가지려고 합니다. 지연이가 가져갈 수 있는 색 테이프는 몇 cm일까요? 영훈=45cm의 5/9만큼 가져갈게. 지연=그러면 나는 나머지를 가져갈게.’ 그리고 45cm 길이의 색 테이프 그림이 있어요. 그림과 대화까지 있다 보니 어떤 건 문제만 한 페이지나 돼요. 풀기도 전에 문제를 보다가 질려버리죠. 이 문제가 머리에 쉽게 들어옵니까?”
※2019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수포자의 첫 갈림길이 초3 ‘분수’에서 시작된다고 발표했다.
―왜 그렇게 가르치는 건가요.
“실생활 소재를 이용해 가르쳐야 한다는 개념을 무리하게 적용한 거죠. 그럴 내용도 있고 아닌 것도 있는데…. 분수 계산은 기능적인 거예요. 45×5/9=25. 먼저 이렇게 가르쳐주고 나중에 원리를 알려줘야 하는데, 거꾸로 원리부터 알려주면 초등학생들이 어떻게 이해하겠어요. 어렵다고만 느끼지. 자전거를 탈 줄 알면 왜 바퀴가 이렇게 돌아가는지 이해하기가 쉽잖아요. 그런데 먼저 바퀴가 돌아가는 원리부터 설명하면 애들이 자전거를 타고 싶겠어요? ‘자포자’가 되겠지요. 쉽게 가르칠 수 있는 걸 왜 일부러 어렵게 가르치는지…. 그리고 우리가 수포자처럼 개념도 모호하고 부정적인 말은 함부로 쓰면 안 돼요.”
―개념이 모호하다니요.
“기초학력이 미달하는 학생들은 있어요. 그런데 그 외에 설문조사로 ‘수학에 흥미가 없느냐’ ‘수학을 못한다고 생각하느냐’를 물어 그렇다고 답한 학생들까지 포함시키는 경우가 많잖아요. 일정 점수 이상 문제를 못 풀었다고 왜 ‘포기자’라는 낙인을 찍나요? 풀고 싶은데 아직 몰라서, 조금 어려워서 못 풀 수도 있잖아요. 학생이니까, 조금 늦더라도 더 배워서 풀면 되지요. 수포자라는 용어를 쓰는 건… 오히려 수포자를 조장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일 수 있어요. 그리고 생각을 바꿔야 해요. 왜 학생들이 쉬운 것만 배워야 합니까? 문제는 쉽게 낼 수 있어요. 하지만 공부는 어려운 것도 배워야지요. 우리 수학 수준을 낮춘다고 다른 나라도 낮추나요? 이건 나라 망하자는 거예요.”
―어려운 수학이 사교육 증가를 부른다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계속 쉽고 부담이 작게 가르쳐 왔지만 사교육은 되레 늘었잖아요. 본질은 경쟁에 있지 쉽고 어렵고에 있는 게 아닌데…. 입시를 구구단으로만 치르면 사교육이 없어지겠습니까? 온갖 종류의 구구단 시험 문제가 만들어져서 학원에 다니게 하겠죠. 입시제도를 자꾸 누더기로 만들다 보니 결국 몇 백억 원씩 버는 소위 ‘일타’ 강사들만 탄생시켰어요.”
―그러다 보니 교육도 점점 더 양극화가 되고 있습니다.
“서민층 자녀들은 있는 집 애들만큼 사교육을 받기 어려우니까요. 그러니까 또 EBS 교재를 만들어 그 안에서 출제하게 하고… 코미디죠. 대학도 문제가 있어요. 학생들 눈치만 보고….”
―눈치요?
“전공별로 모르면 안 되는 과목들이 있어요. 이런 과목들을 배우지 않으면 우리 대학은 입학할 수 없다고 해야 학생들이 공부를 할 텐데 그런 말을 안 하죠. 애들이 지원하지 않는다고. 서울대도 못하니 어느 대학이 할 수 있겠어요. 대한수학회장 임기 4년(재임) 내내 가장 많이 말한 게 우리 수학 교육이었어요. 그게 주 임무가 아닌데….”
―그럼 누가 그런 얘기를 합니까.
“대한수학회장의 임무는 허준이 교수 같은 연구자들을 키우고, 국가 수학 수준을 높이는 거지 초중고교 수학 교육과정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교육이 망가져 가는데도 말하는 사람이 없다 보니 나서게 된 거지요. 교육은 정치 이슈가 되면 안 돼요. 보세요.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공부를 잘 못하는 자녀를 데리고 있습니다.” (잘하는 학생은 소수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공부를 못해도 당신 아이가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다, 어려운 거 안 배워도 대학 갈 수 있다’고 하면 학부모들은 솔깃해질 수밖에요. ‘이 과목은 우리 애가 어려워서 못하는데 안 해도 된다고? 그럼 좋은 대학 갈 수 있겠네’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프로파간다(propaganda·선동 선전)죠. 고1, 고3 2학기 범위에서는 수능 출제를 못하게 하는 게 말이 됩니까.”
―3년 동안 배운 것의 절반에서만 문제를 낸다는 건가요.
“하도 ‘수학은 어렵다’고 하니 학습부담을 줄여준다는 건데… 되레 수학 교육만 엉망이 됐습니다. 2009 개정교육과정에서는 행렬, 2015 개정교육과정에서는 공간벡터가 삭제됐지요. 수학계가 아우성을 치니 2022 개정교육과정에 행렬이 다시 들어갔지만 그나마 어려운 부분은 다 빠지고 기본 개념만 가르치는 정도죠.”
―행렬을 다시 넣은 이유는 뭡니까.
“행렬을 모르면 인공지능(AI), 빅데이터를 할 수가 없어요.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요.” (이세돌 9단과 알파고가 붙은 게 2016년인데 어떻게 이제야….) “그런 게 한두 개가 아니에요. 기하학은 수능 출제범위에서 퇴출됐다가 1년 만인 2022학년도 수능에 선택과목으로 들어갔어요.” (허준이 교수가 필즈상을 받은 분야 아닌가요.) “대수기하학을 바탕으로 조합론의 오래된 난제를 다수 해결하고 조합 대수기하학의 새 지평을 연 공로를 인정받아 받았지요.”
―올해 국제수학올림피아드 대표단(6명)이 모두 서울과학고 학생들이더군요. 우연인가요.
“다단계 선발시험으로 뽑는데 전에는 일반고, 지방 소재 고교 학생들도 있었어요. 그런데 올림피아드 인기가 높아지니까 중학교 때부터 3∼5년씩 전문적으로 사교육을 받으면서 준비하는 학생들이 생겼지요. 집에서 지원해줄 여력이 안 되면 점차 선발되기 쉽지 않은 구조가 된 거예요. 서울과학고 학생들을 뽑은 게 아니라, 1∼6등이 모두 서울과학고인 거죠. 저는 규정을 바꿔서 한 학교 학생들로 모두 채우는 걸 바꾸고 싶지만 그것도 쉽지는 않아요.”
※7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제63회 대회에서 우리 대표단은 금3, 은3으로 종합 2위를 차지했다.
―대한수학회가 선발을 주관하지 않습니까? 회장이신데….
“과거 해보려고 한 적이 있는데 항의가 심했어요. 오랫동안 준비하는 학생들이 많은 데다 한 번 메달을 땄는데도 두 번, 세 번 또 나가서 따려고 하는 애들도 있으니까요.” (다른 나라는 어떻게 선발합니까.) “대부분 성적순으로 뽑지요. 수학이 그냥 좋고 잘해서 두 번 이상 나가는 학생도 있기는 해요. 하지만 2000년 제가 채점위원장일 때 러시아 단장에게서 들었는데 러시아는 2명 정도는 성적순이 아닌 단장 재량으로 발탁한다고 하더군요.”
―발탁은 어떤 기준으로 합니까.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지 보다 이 학생이 앞으로 훌륭한 수학자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본다더군요. 그래서 단장이 선발한 학생들은 실제 대회 성적은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고 했어요. (우리 학생들도)한 번 재능을 확인했으면 귀한 시간을 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데 쓰지 말고 고급 수학이나 인문학 같은 다른 걸 공부하면 더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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