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신당역 화장실 살인사건은 2016년 5월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과 비슷하다. 강남역 사건도 통행량이 많은 주점 건물 화장실에서 발생했고, 남성이 죄 없는 여성을 무참히 살해했으며, ‘여자라서 죽었다’는 분노 섞인 추모와 함께 ‘여성혐오 범죄’ 논쟁이 뜨거웠다.
한국과 달리 미국과 유럽의 다인종 국가들은 인종, 민족, 종교, 성적 정체성 등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 범죄를 따로 분류해 관리한다. 혐오범죄방지법이 있는 미국에서 혐오 범죄는 가중처벌감이다. 코로나 시기 아시아계를 겨냥한 범죄가 대표적인 혐오 범죄다. 구체적으로는 가해자가 특정 인종이나 종교 등에 대해 비뚤어진 신념을 가졌다는 증거가 명확하고, 이 신념이 범죄와 인과관계가 있으며, ‘아시아인이면 다 싫다’는 식으로 피해자가 대체 가능할 때 혐오 범죄로 규정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신당역 사건은 현재로선 여성혐오 범죄로 단정하기 어렵다. 경찰에 따르면 피의자 전주환은 스토킹으로 고소당해 중형을 선고받을 처지가 되자 보복 살인을 저질렀고, 여성혐오적 신념을 갖고 있다는 증거는 아직 없으며, 오랫동안 스토킹해온 피해자만 겨냥했다. 전주환이 범행 전 피해자를 닮은 여성을 뒤쫓는 영상이 공개됐는데,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여성혐오 범죄였다면 그 여성을 상대로 범행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했다.
강남역 사건도 많은 사람들이 여성혐오 범죄로 기억한다. 범인은 흉기를 들고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남자 여섯을 그대로 보내고 여자가 들어오자 바로 범행을 저질렀다. 처음 보는 여성이었다. 검거 직후엔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그랬다”는 진술까지 했다.
하지만 경찰이 프로파일러 5명을 투입해 수사한 결과 내린 결론은 ‘정신질환에 의한 묻지마 범죄’였다. 범인은 2009년 조현병 진단을 받고 입원한 적이 있는데 사건이 발생한 2016년 초 약을 끊어 증상이 악화된 상태였다. 여성혐오가 아니라 악화된 정신질환 탓에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검찰도 범인을 입원시켜 장기간 정신감정을 실시한 후 같은 결론을 내렸다. 1심 법원도 전문의 감정을 통해 ‘여성혐오가 아니라 남성을 무서워하는 성격 및 망상으로부터 영향받은 피해의식으로 상대적 약자인 여성을 대상으로 범행했다’고 보고 30년형을 선고했다. 이는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됐다.
사건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대책이 달라진다. 정부는 강남역 사건 이후 범죄취약지역 폐쇄회로(CC)TV 확충, 신축건물 남녀 화장실 분리 설치와 함께 정신질환자 범죄 방지 대책을 발표했지만 ‘여성혐오 범죄라는 본질을 간과하고 물리적 환경 개선에만 치중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중증 정신질환자의 범죄라는 대목에 집중했더라면 어땠을까. 정신질환자들의 인권을 보호하되 자해나 타해 우려가 있는 경우 선진국처럼 법적인 절차를 밟아 강제 입원시켜 치료받게 하는 제도를 마련했더라면 ‘임세원 교수 사건’이나 ‘안인득 방화 살인사건’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강남역 신당역 사건이 여혐 범죄든 아니든 많은 여성이 공유하는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은 존중받아야 한다. 강력사건 피해자의 절대 다수는 여성이다. 하지만 성차별적 사회구조에 집중하느라 범죄의 재발을 막아줄 현실적 대책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여혐 범죄냐를 따지기보다 어디에서 놓치고 실패했는지 차분하게 복기해야 할 때다. 그래야 앞으로 막을 수 있었던 불행은 막고, 살릴 수 있었던 사람은 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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