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시대, ‘RE100’ 글로벌 표준 부상
삼성전자 동참, 세계 시장 경쟁 태세 갖춰
정부, 재생에너지 인프라 구축에 적극 나서야
삼성전자가 마침내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량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RE100을 선언했다. 이로써 우리나라 기업 23곳이 RE100에 동참하게 됐다. 이 중에서도 유일한 세계 100대 기업인 삼성전자의 가입은 남다르다. 시가총액, 매출액 등 어떤 기준으로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이 왜 이 시점에 RE100 가입을 선언해야 했을까.
먼저 RE100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RE100은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국제 시민단체가 주도하고 있는 글로벌 캠페인이다. 가입 대상은 연간 100GWh 이상의 전기를 사용하는 글로벌 기업이다. 여기에 가입한 기업은 재생에너지로 만든 전기만을 써서 공장을 가동하고 사무실을 운영할 것을 약속한다. RE100 공식 지침서는 재생에너지의 범위를 바이오, 지열, 태양광, 물, 풍력을 이용해 생산한 전기로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현재 381개 기업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RE100 회원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들이 있다. 기업 스스로 생산하는 전기와 외부로부터 공급받는 전기 모두 재생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 2030년과 2040년까지 최소 60%와 90%에 도달해야 하고, 늦어도 2050년에는 100%를 달성해야 한다. 중요한 점은 참여 기업들이 설정한 100% 재생에너지 사용 평균 목표 연도가 20년을 앞당긴 2030년이라는 사실이다. 조기 목표 달성을 위해 서로 경쟁하는 형국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RE100을 주도하는 기업들은 거래관계에 있는 다른 기업들에도 재생에너지 사용을 요구하고 있다. 시가총액 세계 1위 기업인 애플이 대표적이다. 애플에 반도체를 납품하려면 재생에너지로 만든 전기를 사용하라는 것이다. 만약 삼성전자가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2년 전 RE100에 가입한 대만의 TSMC로 거래처를 옮기겠다는 식이다. 현재 대만은 거대 규모의 해상풍력 단지 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자국 대표 기업인 TSMC에 재생에너지 전기를 몰아줄 기세다.
삼성전자는 국내 전기 사용 1위 기업이다. 60% 이상의 전기를 석탄과 가스로 만드는 우리나라 전력 공급 구조상 전기 소비는 곧바로 탄소 배출로 이어진다. 삼성전자의 국내 반도체 공장 증설 계획에 따라 2030년 전력 소비량은 지금보다 두 배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2021년 기준 우리나라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7.5%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평균은 31.3%다. 한국은 압도적인 꼴찌에 머물러 있다. 재생에너지 공급량은 적고, 전기 소비량은 계속 늘어나는 상황에서 삼성전자는 RE100 가입을 결정했다. 글로벌 차원의 재생에너지 사용 요구가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증거다. 더 미뤘다가는 시장에서 낙오할 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의 발로다.
이는 전기차와 배터리, 태양광 패널에 이르기까지 경쟁력 있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동일하게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자체 RE100 달성 후 거래 기업들에도 재생에너지 사용을 압박하고 있는 글로벌 기업이 적지 않다. 이것이 기후위기 시대에 투자자와 소비자로부터 환영받는 가장 효과적인 경영 전략임을 이들은 체득하고 있다. RE100이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 잡은 이유다.
이 대열에 국가가 앞장서고 있다. 미국을 보자. 올해 8월 발효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 담고 있는 핵심 내용은 두 가지다. 첫째, 기후위기 대응과 에너지 안보에 투자한다. 총 투자액의 84%인 약 516조 원이 태양광과 송배전망 건설 등에 집중돼 있다. 둘째, 완결성 있는 산업생태계 구축으로 경제를 키우고 일자리를 만든다. 반도체와 전기차 산업의 시작과 끝을 미국 내에서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명분은 기후위기 대응이고, 실리는 자국 산업 활성화다. 우리 기업들에도 강력한 세금 감면 유인을 제시하면서 투자를 유혹하고 있다.
우리나라 산업계에 더 이상 재생에너지 사용을 외면해서는 어떤 기업도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생존을 위해 RE100에 가입해야 하는 국내 기업 수는 앞으로 더 빠르게 늘어날 것이다. 재생에너지 인프라를 조기에 구축하지 못한다면 한국 산업은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 견디다 못한 기업들이 재생에너지를 찾아 해외로 공장을 옮길 것이기 때문이다. 재생에너지 산업에 각종 규제와 선입견을 덧씌워 재생에너지 공급과 수요 기업을 벼랑 끝으로 내몰아서는 안 된다. 그 결과는 산업 공동화(空洞化)와 일자리 소멸이다. 정부의 정책 전환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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