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 살면서 과일이나 채소는 일주일에 두 번 열리는 동네 장터에서 구입한다. 대형 마트에서 파는 과일은 며칠 두어야 맛이 들거나 매대에서는 멀쩡해 보이는데 집으로 가져오면 쉬이 상할 때가 많아서다. 농부들이 직접 장터에 들고 나오는 것을 선호하는데 당근이며 시금치, 사과 등은 흙 묻은 채로 내놓거나 모양이 덜 예뻐도 사게 된다.
가을 냄새 물씬 풍기는 창밖 풍경에 이끌려 지난주에 장터를 찾았더니 울긋불긋 단풍과도 같은 다양한 빛깔의 사과들이 눈에 띈다. 전 세계에서 매년 8600t이 생산되는 사과는 중앙아시아가 원산지이며 중국이 전 세계 생산량의 50% 이상을 차지한다. 아시아에서 유럽과 북미로 전해진 사과는 수천 년간 접목 방식으로 재배되면서 7500여 종에 달하는 품종이 태어났는데 내 기억 속에 떠오르는 사과 품종은 고작 열 개 남짓한 정도니 앞으로 맛봐야 할 사과가 퍽이나 많은 셈이다.
프랑스에서는 공식적으로 500여 종의 사과가 생산된다. 얼마 전 노르망디에서 만난 사과 농장 주인은 프랑스에서 즐길 수 있는 사과의 종류가 750여 종이라 했으니 아마도 프랑스에서 생산되는 사과에 이웃 나라에서 수입되는 것들의 숫자까지 더한 듯싶다. 거기에 비해 우리나라에 품종 보호 출원된 사과 품종이 77개라는 사실을 보면 확실히 프랑스는 다양성을 갖춘 ‘사과 강국’임에 틀림없다.
프랑스에서 재배되는 사과 중 가장 많이 생산되는 품종은 골든 딜리셔스이고 갈라, 그래니 스미스가 그 뒤를 잇는다. 매년 생산되는 150t의 사과 중 이 세 품종이 50% 이상을 차지한다. 연홍색의 골든 딜리셔스(사진)는 과즙이 많고 맛도 좋지만 재배가 까다로워 우리나라에서는 점차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과즙이 많고 빨갛고 상하로 흰색 줄이 있는 아삭한 식감의 갈라까지는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는 반면, 껍질이 두껍고 신맛이 강한 그래니 스미스는 그냥 먹기보다는 요리용으로 주로 사용된다.
이들 중 대부분의 사과는 영국과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는 바닷가, 노르망디 지역의 대표적인 특산물이다. 연간 강우량이 많은 대신 선선한 해풍을 맞으며 단단하게 단련된 사과는 타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원료인 포도를 대신한다. 노르망디에서 나는 사과는 사과 주스와 ‘시드르’라는 알코올 함량 5% 정도의 식전주, 그리고 이를 증류해서 위스키 형태로 바꾼 ‘칼바도스’로 만들어진다.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저주받은 날씨’로 불리는 노르망디 기후의 약점을 극복해서 강점으로 전화위복시킨 주인공이 사과이다.
당도 높은 과일만을 선호하는 우리와 달리, 프랑스인들은 신맛과 단맛의 밸런스나 사과 품종 각자의 개성을 존중한다. 직접 먹기도 하고 오븐에 넣어 달콤쌉싸름한 타르트를 만드는가 하면, 품질 좋은 술의 형태로도 만든다. 그들에게 다양한 사과 품종은 가을의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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