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수출을 이끄는 대기업들이 잇달아 실적 전망을 낮추거나 투자계획을 철회하고 있다. 수출품의 글로벌 수요가 줄고 가격까지 떨어지고 있어서다. 어제 발표된 지난달 무역수지는 외환위기 이후 처음 6개월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경제위기 가능성은 매우매우 낮다”는 낙관론을 폈다.
4월부터 9월까지 쌓인 무역적자는 288억8000만 달러로 역대 최대다. 지난달 반도체 수출이 두 달 연속 감소했고, 석유화학 철강 등도 부진해 수출은 2.8%밖에 안 늘었는데, 에너지와 원자재 값이 올라 수입이 18.6%나 증가했기 때문이다. 원-달러 환율 급등까지 겹쳐 한국의 무역적자는 고착화되는 모양새다. 잠시 떨어지던 국제유가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감산 움직임에 다시 들썩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인플레이션이 끝날 때까지 기준금리를 올린다는 미국의 태도가 분명해지면서 글로벌 경기침체 장기화는 기정사실이 됐다. ‘반도체 빙하기’를 맞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하반기 매출 전망을 낮춰 잡으면서 비상경영에 돌입했다. 정유업계는 잇달아 투자계획을 철회했고, 많은 대기업들이 돈 가뭄에 대비해 현금유동성 확보에 나서고 있다. 실물과 금융 양쪽에서 위기가 동시에 닥치는 모양새다.
그런데도 필리핀을 방문 중인 추 부총리는 “경제위기가 재연될 가능성은 매우매우 낮다는 게 외부의 시각”이라고 했다. 외환보유액이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 규모이고, 연간 경상수지는 흑자가 날 것이란 게 근거다. 하지만 국제 금융계에서 ‘제2의 아시아 외환위기’가 거론되고, 원화가 ‘취약 화폐’로 지목되는 상황이다. 위기를 일부러 조장할 필요가 없다 해도 경제 컨트롤타워의 상황 인식으로는 너무 한가하다.
올해 무역적자가 사상 최대인 480억 달러(약 69조2000억 원)에 이를 것이라고 한국경제연구원은 전망했다. 통계 작성 이후 최대이고, 외환위기 전년도의 2.3배다. 기업 역외실적과 금융·서비스를 포함한 경상수지가 곧 적자로 돌아설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넉 달간 이어지던 대중 무역적자는 멈췄지만 중국의 수출이 늘면 한국이 돈을 버는 무역구조는 이미 효력을 다해 가고 있다. 이런 현실과 괴리된 진단은 위기를 극복할 정부의 전략과 의지를 의심케 해 시장의 불안만 키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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