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이래 최초. 요즘 나는 이런 표현을 자주 쓰고 있다. 국격이 올라가고, 거기다 한류까지 국제무대에서 각광받고 있으니, 더욱더 그렇다. 현재 한국인이 뭔가 만들었다 하면 국제적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이에 미술 분야도 뭔가 거들어야겠다는 의무감 같은 것도 생기고 있다. 그래서 나는 미술한류라는 말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국제무대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위상 높이기. 미술한류의 서막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뮤지엄(LACMA)에서 성대하게 출발했다. ‘사이의 공간: 한국미술의 근대’라는 제목 아래 국립현대미술관과 공동 주최한 한국 근대미술 특별전이다.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130점가량의 작품은 이방인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질곡과 암흑 시절의 산물. 즉 식민지, 분단, 전쟁, 독재, 산업화, 민주화 등으로 이어지는 20세기 한국 역사를 반영한 작품들이지 않은가. 이렇듯 20세기의 한국 미술품이 구미 사회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단군 이래 최초의 서구권에서 개최되는 근대 미술전이라고 의미 부여하고 있다.
나는 LACMA 전시장에서 우리 미술품을 감동적으로 음미하면서 한 작가를 떠올렸다. 1985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난 여성 미술의 선구자 백남순(1904∼1994)이다. 이번 전시장을 비중 있게 차지하고 있는 그의 ‘낙원’(1936년)도 있다. 이 작품은 이건희 컬렉션 기증품 속에 들어 있어, 국립현대미술관의 ‘MMCA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전에 소개했다. 작품의 형식부터 특이한바, 우선 캔버스에 유화이면서 8폭 병풍 형식을 지니고 있다. 병풍 형식을 강조하려고 화가는 그림의 테두리까지 그려 넣었다. 내용은 산수화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서양식 건물과 인물 등이 보이고 있다. 크게 보아 동서양 융합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일제 암흑기에 그린 화가의 이상향이라 할 수 있다.
백남순은 나혜석(1896∼1948)에 이어 도쿄 유학을 간 초기의 여성 화가다. 그는 미지의 세계로 도전하고자 프랑스 파리 유학을 단행했다. 1930년 파리의 하늘 밑에서 동족의 청년 화가를 만났다. 바로 임용련(1901∼1950)이다. 그는 미국 예일대를 수석 졸업하고 유럽 일주여행 중이었다. 이들은 센강 하류의 에르블레 성당에서 혼례식을 올리고 양가 부모에게 인사차 귀국했다. 같은 해 동아일보사에서 부부 유화전을 개최하여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동시대 최고의 지성 화가라 해도 이들이 선택할 직장은 없었다. 이 부부는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로 갔고, 여기서 제자 이중섭(1916∼1956)을 키웠다. 정주에서 광복을 맞았지만 이내 공산치하를 피해 월남했다. 미국통이었던 임용련은 인민군 치하의 서울 중부서로 끌려가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군다나 이들의 작품을 실은 기차는 평북 고읍역에서 남행을 멈추었고, 뒤에 폭격으로 전소되는 불행을 안아야 했다. 비운의 화가였다.
나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백남순 화가를 만났었다. 그전까지는 서신 왕래로 소식을 주고받던 사이였다. 화가는 젊은 비평가를 위해 시내 관광을 같이 했고, 심지어 자신의 무덤 자리까지 보여주었다. 그 뒤 화가는 원래 살았던 뉴욕으로 돌아왔고 마침 나의 뉴욕 시절과 겹쳐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어떤 여름은 화가의 가족들과 샌프란시스코에서 함께 지내기도 했다. 이민 가족이면서 화가의 4녀 3남 자녀들은 모두 훌륭하게 장성하여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백남순의 증언을 나는 미술잡지 ‘가나아트’ 창간호(1988년)에 자세하게 소개한 바 있다. 증언은 나혜석과의 파리 추억, 그리고 첫 조소 작가 김복진(1901∼1940)과의 작품 교환 등 미술계 비화로 이루어졌다. 당시 나는 신문 연재를 통하여 임용련 백남순 부부화가를 소개하고 유존작 전무의 불행한 현실을 통탄한 적 있다. 신문을 본 독자의 전화는 묻혀 있던 이들의 작품을 발굴하는 계기를 주었다. 임용련의 ‘에르블레의 풍경’(1930년)이나 ‘금강산’(1940년) 같은 작품도 그 당시 발굴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백남순 친구라는 할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그래서 급히 달려가 확인한 작품이 바로 ‘낙원’이었다. 결혼 선물로 받은 작품이라 했다. 나는 사진 촬영을 위해 그 ‘병풍 대작’을 메고 아파트 옥상까지 올라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 작품을 처음 소개할 때는 부부전 출품작으로 알고 1930년 작이라고 했지만, 뒤에 화가는 1936년경 오산학교에서 제작한 것이라고 정정해 주었다. 당시 남편은 두 틀의 병풍을 만들었고, 각각 나누어 그림을 그린 바 있다고 했다. ‘낙원’은 오산학교 전시실에 오랫동안 진열하기도 했다. 이러한 ‘낙원’을 이건희 컬렉션에서 오래간만에 확인하고 나는 감동했다. 그런 비화의 작품이 지금 로스앤젤레스에서 화려하게 각광받고 있으니, 화가는 어떻게 생각할까.
질곡의 시대. 한국 근대기의 미술은 모두 피맺힌 결정체와 같다. 직업으로서 화가라는 직종을 허용하고 있지 않던 시절. 숱한 화가들은 천형(天刑)처럼 그림을 그려야 했다. 그런 희비애락의 결정체가 우리 근대기의 예술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토양에서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한류가 아니고 무엇일까. 국격을 높이는 한국의 문화예술,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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