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외건전성 좋아 당장 외환위기 가능성 낮지만
외부 충격 취약 감안해 위기 시나리오에 넣어야
“정말 외환위기가 다시 오는 거야?”
최근 지인들로부터 이 질문을 자주 받는다. 미국 블룸버그통신이 지난달 말 경제 전문가를 인용해 “엔화가 달러당 150엔을 돌파하면 1997년 같은 아시아 외환위기가 올 수 있다”고 보도한 다음부터 특히 그렇다.
시간을 과거로 돌려보자. 1997년 12월 3일 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과 구제금융 협상을 맺었다. 구제금융을 받는 대신 한국 경제가 IMF 관리체제에 편입되면서 경제주권을 잃게 됐다. 한보, 기아, 대우, 한라그룹 등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거나 팔려나갔다. 또 간신히 살아남은 곳은 강력한 구조조정이 진행됐다. 한동안 매일 1만 명의 실업자가 새로 생겨났고 자살자가 속출했다.
국민들의 자존감에 큰 생채기를 냈던 외환위기는 ‘외화 유동성’에 문제가 생기면서 일어났다. 1997년 말 외환보유액은 204억 달러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3.7%에 불과했다. 대외자산도 없었다. 오히려 대외부채가 더 많았기에 대외순자산은 645억 달러 적자였다. 국내 금융기관은 해외에서 외화를 빌려 왔는데, 외국 금융기관들이 외화 차입금 만기를 연장하지 않고 회수에 들어갔다. 한국이 달러를 얻기 위해선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고환율, 고물가, 무역적자 등 현상은 1997년과 비슷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외환을 포함한 대외건전성이 크게 다르다. 9월 말 기준 외환보유액은 4167억7000만 달러로 GDP의 20%가 넘는다. 대외순자산은 7441억 달러에 이른다.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는 지난달 28일 한국의 대외건전성에 대해 “무역적자 및 외환보유액 감소 등에도 불구하고 대외순자산과 연간 경상수지 흑자 전망 등을 고려할 때 양호하다”고 평가했다. 이 같은 상황을 종합할 때 현 시점에서 제2의 외환위기를 맞을 가능성은 낮다. 그렇기에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가 재연될 가능성에 대해 “매우매우 낮다는 게 외부의 시각”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단정해선 안 된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2009년 경제사령탑에 구원투수로 등판했던 윤증현 전 기재부 장관은 입버릇처럼 “해외가 기침을 하면 한국은 홍역을 앓는다”고 말했다. 그만큼 한국 경제는 외부로부터의 경제 충격에 취약하다. 그랬기에 윤 전 장관은 만기 1년 미만의 단기외채 증감에 극도로 민감했다. 언제든 한국 시장을 떠날 수 있는 단기외채는 외환위기의 트리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6월 말 기준 단기외채 비율은 41.9%로 10년 만에 가장 높다. 2017년 이후 주식과 채권 시장에 매년 외국인 자금이 유입됐지만, 올해는 1∼8월 동안 5조6000억 원이 빠져나갔다. 외환위기 때와는 달리 경상수지는 최근 꾸준히 흑자를 유지했다. 상품수지 악화에 해외 배당이 겹친 올해 4월만 제외하고 2020년 5월 이후 올해 7월까지 꾸준히 흑자였다. 하지만 월간 기준 사상 최대 무역적자를 냈던 8월에 경상수지 역시 적자로 돌아섰을 가능성이 높다.
경제는 심리다. 1997년과 달리 외환보유액이 아무리 넉넉하고, 대외순자산이 많아도 한국 경제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는 순간 해외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수 있다. 위기대응 시나리오에 외환위기 가능성까지 포함시켜 경제 정책을 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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