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서리 이마에 차다 무릎 덮는 낙엽길 구름 비낀 새벽달만 높아라 가을 별빛 받아 책을 읽는다 단풍잎 하나 빈 숲에 기러기로 난다
―이희숙(1943∼)
열일곱 번째 절기, 한로(寒露)가 찾아왔다. 이 바쁜 세상에서 누가 절기를 기억할까. 한로는 분명히 존재하면서도 점점 잊혀지고 있는 이름이다. 세상에 그런 단어가 한로뿐만이 아니다. 내가 잊어가는 이름이 숱하게 많고, 내 이름도 잊혀지는 숱한 이름 중 하나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한로’라는, 쓸쓸하고도 맑으며 고고한 단어를 쉽게 지나칠 수 없다.
한로에 딱 맞춰 읽기에는 오늘의 시가 제격이다. 이 시의 부제가 바로 한로이다. 여기에는 새벽녘에 깨어 있는 한 사람이 나온다. 새벽은 ‘차가운 이슬’이라는 뜻의 한로에 어울리는 시간대다. 춥고 맑은 한로를 몸으로 느낀 시인은 먼 데로 시선을 돌린다. 시의 쌀쌀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가을의 운치 그대로다.
사실 이슬이란 그다지 긍정적인 이미지는 아니다. 덧없이 스러지는 인생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이덕무가 ‘달빛, 이슬, 바람, 꽃 따위 쓸모없는 말’이라고 표현한 구절을 보면 그때도 이슬은 예쁘긴 예쁜데 쓸데없는 것이었나 보다. 그런데 시인들은 이 헛된 이슬을 사랑했다. 김소월의 산문에 보면 ‘높고 맑은 행적의 거룩한 첫 한 방울의 이슬’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쉽게 사라지는 이슬을 대단히 고평하는 사람들이 바로 시인인 것이다. 단단하지도 않고 오래가지도 못하는 이슬이 절기가 되고 시가 되며 가치가 된다. 차가운 이슬의 날에 이슬의 아이러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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