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떠오르는 환란 악몽
원화, 동남아國 통화보다 불안정
미중 신냉전에 ‘낀’ 처지 반영
위기의식 없는 정치가 위기 조장
한국은 유엔무역개발회의가 공인한 선진국이다. 1인당 국민소득은 인도네시아보다 7.5배, 태국보다 4.7배가 많다. 경제적 풍요뿐 아니라 공공부문의 투명성, 사회적 안정성도 크게 앞선다. 어디를 봐도 세 나라를 하나로 묶기가 쉽지 않을 것 같지만,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이름하여 ‘환란 3국’이다. 1997년 발생한 동아시아 외환위기는 많은 나라에 타격을 줬지만 국제통화기금(IMF)에서 구제금융까지 받은 나라는 3곳뿐이다.
달러가 초강세를 보이면서 아팠던 환란의 기억이 다시 소환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지난달 26일 ‘위기 수준의 위험’을 거론하면서 가장 취약한 통화로 한국 원화, 필리핀 페소화, 태국 밧화를 지목했다. 과거 환란 3국 중 인도네시아는 거론되지 않았다. 한국 원화가 인도네시아 루피아화보다 ‘위험한 돈’이라는 평가를 받은 셈이다.
이를 일부 애널리스트와 언론의 편견으로 치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원화 가치의 추락 속도를 보면 그러기가 쉽지 않다. 올해 원화는 달러화 대비 16%가량 떨어졌다. 이에 비해 루피아화는 6% 하락에 그쳤다. 비단 루피아화뿐이 아니다. 원화 가치는 인도 루피화, 말레이시아 링깃화, 태국 밧화, 필리핀 페소화에 비해서도 더 가파르게 떨어졌다. 주가를 보더라도 올 들어 한국 코스피가 25% 떨어지는 동안 인도네시아 증시지수가 5% 오른 것을 보면 한국 경제에 대한 상대적인 평가가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길이 없다.
정부는 과거보다 크게 늘어난 외환보유액 등을 들어 위기 가능성을 부인한다. 하지만 첨단산업 강국임을 자부하는 한국의 통화가 동남아시아 개발도상국들보다 약세를 보이고 있는 현상은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어쩌다 한국의 원화가 동남아 여러 나라들의 통화보다 불안정하다는 불명예를 안게 된 것일까.
도널드 트럼프 이전의 세계 경제는 주요 2개국(G2)의 국제 분업에 기초해 안정적인 성장을 구가해 왔다. 미국의 자본과 기술이 중국으로 건너가 14억 인구를 먹여살릴 일자리를 만들고, 중국은 저가의 공산품을 통해 인플레이션 없는 미국 경제를 뒷받침했다. 한국은 이 같은 세계화 흐름을 가장 잘 활용한 나라 중의 하나였다. 반도체·화학제품 같은 중간재의 대중(對中) 수출이 IMF 이후 한국 경제를 견인한 주력 엔진이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에서 시작된 ‘미중 신냉전’이 조 바이든 대통령 들어 더 가속화하면서 한국은 ‘두 고래 사이에 낀 새우’ 중에서도 가장 고달픈 신세가 됐다. 한국 경제의 ‘비즈니스 모델’ 자체가 통째로 무너져 내릴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다. 이런 위기에서 국제 금융시장의 신뢰를 잃지 않으려면 바뀐 글로벌 환경에 맞게 경제구조를 뿌리부터 개혁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기본이다.
하지만 변화를 이끌어야 할 정치권과 정부는 위기의식 자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집권여당은 경제를 아예 내팽개친 채 새 대통령의 임기 초기 석 달을 집안싸움으로 허비했다. 과반의석을 차지한 제1 야당은 기초연금 인상, 쌀 시장 격리 의무화 등 재정 축내기 정책으로도 모자라 과격한 파업을 조장하는 ‘노란 봉투법’까지 강행하려 한다. 제조업 기반을 아예 초토화시킬 셈인가.
더 큰 문제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있다. 한국 경제가 생존이 걸린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초당적 대처가 필수인데도 윤 대통령은 최소한의 협치를 이끌어낼 리더십조차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고도의 경제안보 전략을 논의해야 할 국회를 ‘날리믄-바이든’과 같은 저급한 공방의 무대로 만들어 놓은 데도 윤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 국민적 에너지를 하나로 결집시킬 비전이나 어젠다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진영·세대를 넘어 인재를 구하고 머리를 빌리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최근 인도네시아 경제의 선전(善戰)에는 자원부국이라는 배경이 깔려 있다. 하지만 정치나 정부의 리더십이 없이 경제가 저절로 잘되기는 어렵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2045년까지 세계 4대 강국에 진입한다는 그랜드 청사진을 내걸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이를 위한 정치적 추진 동력을 얻기 위해 두 번의 대선에서 맞붙은 최대 정적을 자신의 내각에 참여시켰다. 30대 벤처기업가를 교육문화부 장관으로 발탁하는 파격도 보였다.
이런 모습들을 보다 보면 원화가 루피아화보다 저평가를 당하는 현실이 자존심은 상할지언정 꼭 억울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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