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국가 정상들 가운데 전쟁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사람은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일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전세를 역전하고 있지만 트러스 총리는 집권 후 첫 정책인 대규모 감세안을 철회하면서 국내에서 민심을 잃고, 국제적으로도 체면을 구겼다. 지난달 23일 50년 만에 최대 폭의 소득세 감세안을 발표했다가 파운드화 가치가 폭락하고 국가 부채 우려가 불거져 금융시장이 대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트러스 총리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헛발질을 했을까. 전문가인 관료들 의견을 무시한 점이 결정적이었다고 본다. 트러스 총리가 감세안을 발표하기 전까지 관료들 의견을 충분히 수렴했는지 의문이다. 감세안 철회 발표 전날 긴급회의에서 여러 부처 장관들이 감세안에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관료들 의견을 진작 경청했다면 감세안 발표를 미루거나 소폭 수정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트러스 총리는 취임 첫날 톰 스칼러 당시 재무장관을 경질한 뒤 ‘이념적 숙청’을 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스칼러 전 장관은 워낙 경험이 풍부한 고위 관료인데 트러스 총리가 내각 출범과 함께 자신의 말을 따를 후임자를 앉히려 스칼러를 내쳤다는 얘기였다.
물론 정치인들이 관료들에 맞서 개혁을 두려워하는 공직사회 관행을 깨고 수세적인 태도를 적극적인 행정으로 전환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해법이 복잡한 위기 땐 현장을 잘 꿰고 있는 전문 관료의 인사이트가 절실하다.
제2의 마거릿 대처를 자처하는 트러스 총리는 감세 공약을 뚝심 있게 추진하면 ‘철의 여인’으로 찬사를 받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약이 집행될 때 여건이 많이 변했다면 융통성 있게 수정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인플레이션에 신음하고 달러화 초강세에 불안해하는 여론을 제대로 파악했다면 국가 재정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정책을 굳이 이 시점에 내놓진 않았을 것이다. 각종 스캔들로 불명예스럽게 퇴진한 보리스 존슨 전 총리의 측근들마저 ‘우리 때는 대국민 여론조사를 정책 판단의 지표로 삼았다’고 비꼴 정도다.
트러스 총리가 한국에서 이런 정책을 발표했다고 상상해 보면 너무나 아찔하다. 물론 영국은 국가 채무가 국내총생산(GDP)의 100%를 넘는 등 한국보다 부채 문제가 훨씬 심각하다. 감세 규모나 방식도 우리와는 달라 단순 비교는 어렵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국가 채무가 더 늘고, 영국같이 50년 만의 최대 규모 감세가 추진된다면 한국 원화는 준기축통화인 영국 파운드화보다 더 속절없이 추락하고, 국내 증시에서 외국인 엑소더스가 폭발할 수 있다. 1997년 외환위기보다도 더 큰 재앙이 닥칠지 모른다. 한국은 최근 원화 가치 방어를 위해 달러화를 시장에 내다 팔며 외환보유액이 9월 큰 폭으로 줄었다.
한국도 트러스 총리 같은 실책으로 혼란을 겪지 않으려면 정부가 정책 발표 전 전문성 높은 관료, 국회와 제대로 소통하고, 공약을 여건에 맞게 조절해야 한다. 더불어 트러스 총리가 신중하지 못했던 재정 운용의 중요성도 새삼 깨닫는다. 우리도 남의 일로만 여기지 말고 수년째 법제화되지 못한 재정건전성 지표 ‘재정준칙’을 속히 도입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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