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가슴속에 화가 치미는구나! 염병아! 내려가거라! 치미는 슬픔아, 네가 있는 것은 아래다.”
―셰익스피어 ‘리어왕’ 중
‘리어왕’ 2막 4장의 아주 유명한 대사다. 영토를 나눠 받은 딸들이 갈수록 자신을 홀대하는 처지에 분노하여 리어왕이 내뱉은 말이다. ‘염병아!’로 번역된 영어 원문은 ‘히스테리카 파시오(hysterica passio)!’다. 당대에 ‘히스테리카’는 자궁을 의미했다. 자궁이 위로 솟구치고 심장이 조여 오고 마침내 목구멍까지 타게 만드는 증상이 바로 히스테리카 파시오다. 우리 어머님들이 시집살이하면서 얻은 ‘화병’과 비슷한 게 아닐까.
리어왕은 왜 화병이 났을까? 강력한 군주였던 리어왕이 딸에게 배반을 당하고 스스로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궁이란 의미를 가진 ‘히스테리카’라는 말을 굳이 쓴 것도 딸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려 셰익스피어가 의도한 대사 아니었을까?
따라서 이 대사는 젠더의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딸들에게 땅을 주는 순간 리어왕의 가부장 권력은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딸에 대한 적개심…. 절대 군주, 봉건 군주의 시대에 강력했던 왕의 남성성을 생각하면 일리 있는 해석이다.
또 다른 해석이 있다. 이번엔 역사적 관점이다. ‘리어왕’의 원본 3판까지 히스테리카는 히스토리카(historica)로 되어 있다. 화병의 근원을 이번에는 자궁이나 젠더가 아닌 ‘역사적’이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영토를 잃은 리어왕의 분노를 역사의 관점에서 보자. 중세 봉건제에서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절대 권력 몰락의 징표다.
젠더와 역사, 두 관점 모두에서 우리는 가부장적 리더의 운명을 엿볼 수 있다. 새 시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꾸만 과거로 회귀하려는, 현대의 리어왕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