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식당에서 케이크 두 조각에 팁까지 추가했더니 23.8달러가 나왔다. 대충 2만8000원이라고 생각했다가 나중에 환율로 계산하니 3만5000원에 달했다. 높은 인플레이션에 ‘킹 달러(달러화 초강세)’까지 겹친 요즘 미국 뉴욕 물가를 ‘뉴 노멀’로 믿고 싶지 않아서 그런지, 자꾸 지난해 환율로 계산하게 된다. ‘블루보틀’ 라테 한 잔이 1만 원인 세상을 어떻게 현실로 받아들이란 말인가.
가끔 이런 생각도 든다. ‘설마 미국이 달러를 이렇게 두겠어?’ ‘설마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또 자이언트스텝(기준금리 0.75%포인트 인상)을 하겠어?’
요즘 증시도 현실 부정과 희망, 공포가 뒤섞인 한 편의 드라마 같다. 시장은 연준이 내년쯤 금리 인하로 정책 전환(피봇)을 할 수 있다고 희망을 키워 왔다. 하지만 8월 말 “고통이 와도 긴축은 계속된다”는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의 잭슨홀 연설로 희망은 공포가 됐고, 폭락장이 시작됐다. 그래도 기회만 되면 ‘위시풀 싱킹(wishful thinking·희망적 사고)’이 찾아온다. ‘설마, 유럽에서 금융위기가 터질지 모르는데 연준이 가만히 있겠어?’
연준 인사들은 시장 희망에 “미국 금융시장은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며 선을 그었다. 세계 경제를 좌우하지만 금리 인상은 미국 경제지표만 보고 간다는 연준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다음 달 네 번째 자이언트스텝이 올 수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블랙 스완’ 저자 나심 탈레브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는 15년 동안 (제로금리) 디즈니랜드에 살았다”며 “경제 구조가 무너지는 동안 암 덩이가 생겨났다”고 했다. 오랜 시간 우리 사고방식을 지배한 저금리, 저물가 세계가 사라졌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은데 ‘암 덩이’가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것은 더욱 어렵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도 ‘집값은 계속 오른다’는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부실한 주택담보대출 기반 파생상품을 남발한 것이 원인이 됐다. 경고음은 계속 울렸지만 ‘설마…’ 하며 멈칫대다 리먼브러더스 파산을 보고 나서야 실상을 직시할 수 있었다.
얼마 전 영국에서 ‘제2의 리먼 사태’가 올 뻔했다.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의 감세 정책이라는 헛발질이 영국 국채 금리를 폭등(국채 가격 폭락)시켰다. 강(强)달러, 고물가, 대규모 부채로 취약해진 영국 경제 현실을 보지 못하고 과거 (감세) 성공사례를 그대로 끌고 온 탓이다.
이 와중에 2400조 원 규모 영국 국채 기반 파생상품시장이 금융위기 뇌관으로 작용할 뻔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설마 저금리에 영국 장기 국채 가격이 폭락하겠어?’
이런 믿음으로 연기금이 투자한 막대한 국채 기반 파생상품(LDI)이 국채 가격 폭락으로 줄줄이 마진콜(margin call·추가 증거금 요구)을 받게 됐다. 영국 중앙은행이 다급하게 대규모 국채 매입에 나서 연기금 파산을 사전에 막을 수 있었지만 언제 어디서 약한 고리가 터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세계 경제가 1930년대 ‘케인지언학파 등장’, 1990년대 ‘자유무역 도래’처럼 역사적 전환기에 왔다”고 했다. 40년 만의 고물가, 보호무역 대두, 신(新)냉전…. 정체가 아직 불분명한 새로운 시대다. ‘설마’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새로운 시대를 대비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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