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9일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식에서 연주된 음악 중에는 여왕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곡이 있다. 작곡가 랠프 본 윌리엄스(1872∼1958)가 여왕의 대관식을 위해 작곡한 찬송가 ‘오 주께서 얼마나 자비로우신지 보고 맛보라’다. 1953년 6월 2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여왕의 새로운 시대를 알린 이 곡은 69년 뒤 같은 곳에서 그의 마지막 길에 함께했다.
두 개의 큰 의식에서 본 윌리엄스의 존재감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여왕의 대관식에서는 그의 다른 찬송가 ‘지상에 사는 모든 백성들아’와 ‘상투스’(영광송), G단조 미사 중 ‘크레도(사도신경)’, 그가 편곡한 민요 ‘푸른 옷소매’ 등이 연주됐다. 여왕의 장례식에서는 본 윌리엄스의 교향곡 5번 3악장을 편곡한 ‘로만차’가 오르간으로 연주됐다.
본 윌리엄스는 에드워드 엘가(1857∼1934)와 함께 영국의 국민 작곡가로 꼽힌다. 영국의 음악 전통은 오스트리아와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에 비해 풍요하다고 보기 힘들었다. 20세기 대중음악의 켈틱 음악 붐에서 보듯 풍요한 민속음악의 자산을 갖췄지만 엘가 이전에는 독일에서 데려온 조지 프레더릭 헨델(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1685∼1759)을 자국 음악문화의 대표 인물로 꼽을 정도였다.
엘가에 이어 영국 음악의 부흥을 이끈 본 윌리엄스는 독일어권 음악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1907년 35세의 나이에 프랑스로 향했다. 스승은 그보다 세 살 어린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었다. 라벨에게 배운 뒤 그는 “예전과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예술의 문제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음악을 모방하지도 않았다. 라벨은 “내 음악(스타일)을 사용하지 않은 유일한 제자가 본 윌리엄스”라고 말했다.
그 대신 본 윌리엄스가 영감과 영향을 받은 곳은 고국 영국의 민요였다. 프랑스로 가기 4년 전 그는 영국의 전원을 다니며 시골 사람들이 부르던 노래들을 악보에 옮겨 적었다. 영국의 르네상스 음악도 공부했다. 민요에서 받은 감흥은 그가 민요를 편곡한 ‘푸른 옷소매 환상곡’으로, 르네상스 음악의 영향은 16세기 영국 작곡가 토머스 탤리스의 곡을 편곡한 ‘토머스 탤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으로 결실을 보았다. 두 곡 모두 서늘한 대기가 몸에 붙는 듯한, 요즘 우리나라의 계절감과도 맞는 작품들이다.
1,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경험한 본 윌리엄스는 음악으로 평화를 호소한 작곡가이기도 했다. ‘토머스 탤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 원곡은 구약성서 시편 2편을 가사로 탤리스가 쓴 성가다. 가사는 이렇다. ‘어찌하여 열방들이 분노하며 그 백성들이 헛된 일을 도모하느냐?’ 헨델이 오라토리오 ‘메시아’에서 베이스 아리아로 표현한 가사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식에서 오르간으로 연주된 교향곡 5번은 2차대전 와중에 평화를 간구하고 희생자들의 안식을 기원한 곡이다. 3악장 ‘로만차’는 17세기 영국 작가 존 버니언의 구절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는 슬픔으로 안식을 주시고 죽음으로 생명을 주셨도다.’
그의 여러 곡 중에서도 한국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작품은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종달새의 비상’일 것이다. 이른 봄 날갯짓을 하는 어린 새를 묘사한 이 곡은 피겨 스케이터 김연아의 시니어 데뷔 프리 프로그램 곡으로 쓰였다. 세상으로 비상을 꿈꾸는 김연아에게 딱 맞춤한 선곡이었다.
내일(10월 12일)은 본 윌리엄스가 태어난 지 150년 되는 날이다. 영국의 여러 오케스트라와 음악축제가 교향곡 5번을 비롯한 그의 대표작을 올해 프로그램에 올렸다. 우리나라에서는 8월에 국립합창단이 그의 대작이자 첫 교향곡인 ‘바다 교향곡’을 국내 초연했다. 그의 기념 연도에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그가 한층 더 크게 기억될 기회를 마련해준 셈이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북한의 잦은 미사일 도발도 평화를 염원했던 본 윌리엄스의 음악을 다시 꺼내 듣게 만든다. 본 윌리엄스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대관식을 가진 5년 뒤 그곳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잠들었다. 그가 저 세상에서 누릴 평화처럼 이 세상에도 평화가 가득하길 기원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