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세우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테네 왕이다. 그와 관련된 일화 중 가장 유명한 것이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이야기다. 크레타의 왕 미노스의 아내 파시파에는 황소와 교접하여 몸은 사람이지만 머리는 소인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는다. 이에 미노스는 다이달로스에게 한번 들어가면 쉽게 나올 수 없는 미궁(迷宮)을 만들게 하고, 거기에 미노타우로스를 가두고 젊은 남녀 각각 7명을 제물로 바쳤다.
당시 아테네의 왕자였던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죽이려고 크레타섬에 도착한다. 미노스의 공주 아리아드네가 테세우스에게 반한 나머지, 미노타우로스를 죽일 칼과 미궁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할 붉은 실타래를 준다.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마침내 미궁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다. 그다음 전개는 이야기마다 다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스토리는 아리아드네가 잠든 틈을 타서 테세우스 혼자 크레타섬을 떠났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인간과 동물 간의 교접, 괴물의 탄생, 빠져나오기 어려운 미궁, 영웅의 등장, 비극적 사랑 등 자극적인 요소가 가득하다. 이 중에서도 특히 예술가의 관심을 끈 것은 아리아드네의 운명인 것 같다. 사랑하는 이가 미궁을 벗어나게 도와줄 능력은 있었으나, 스스로 사랑의 미궁에서 빠져나올 능력은 없었던 아리아드네는 비극적 짝사랑을 상징한다. 여성의 ‘충심(loyalty)’이라는 덕목에 관심이 많았던 신고전주의 화가 앙겔리카 카우프만(1741∼1807)은 상심한 아리아드네의 모습을 거듭 그렸다. 사랑하는 테세우스는 과연 어디에? 1774년 작에는 상심한 아리아드네의 손 너머로 저 멀리 떠나는 테세우스의 배가 보인다. 카우프만은 1774년 이후에 다시 한번 아리아드네의 모습을 그리는데, 그 그림에는 이뤄지지 못한 사랑을 탄식하며 울고 있는 에로스가 등장한다.
사랑에 관심 있는 이에게는 아리아드네가 관심의 대상이겠지만, 사상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이에게는 테세우스의 배가 더 흥미롭다. 아리아드네의 연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아테네로 귀환한 테세우스는 대단한 일을 해낸 영웅 대접을 받는다. 아테네 사람들은 테세우스가 타고 온 배를 보존하기로 결정한다. 배의 판자가 썩으면, 썩은 판자를 새 판자로 교체하면서까지 데메트리오스 팔레레우스의 시대(기원전 3세기)까지 배를 보존했다고 한다. 그런데 오랜 세월 그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결국 그 배의 모든 판자는 새 판자로 교체될 것이 아닌가. 모든 판자가 다 교체된 배, 그 배를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수 있을까? 과연 테세우스 배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영웅전으로 유명한 플루타르크는 테세우스의 배를 사례로 들어 정체성에 관해 이처럼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우리도 유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만약 한국인을 한 명 한 명 다 새로운 사람들로 교체하면, 그 한국은 여전히 한국일까?
저서 ‘몸에 대하여’에서 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한술 더 뜬다. 만약에 테세우스의 배에서 나온 낡은 판자들을 버리지 않고 고스란히 모아 똑같은 배를 만든다면, 그 배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새로운 판자로 개비한 첫 번째 배와, 낡은 판자를 사용해 만든 두 번째 배 중 어느 것이 진정한 테세우스의 배인가? 만약에 현재의 한국인들이 모두 어디론가 이민 가서 나라를 세우고, 현재 한반도에는 외국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둘 중 어느 나라가 진정한 한국인가? 단군의 자손이라는 신화적 설명으로 과연 이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을까.
홉스의 생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도 있다. 낡은 판자들을 모아 또 하나의 배를 만들면 뭐 하나, 그 낡은 판자들 역시 예전 그 판자들이라는 보장이 없는데. 세월의 풍화를 거치면서 그 판자들도 많이 변형되었을 것이다. 30년 전 당신과 현재의 당신은 같은 사람인가? 당신의 세포와 마음은 30년 전과는 꽤 다를 텐데? 혹시 별도의 인물은 아닌가? 만약에 자신의 유전자를 더 고스란히 잘 간직하고 있는 복제인간이 있다면? 그가 혹시 진정한 당신은 아닌가?
이런 질문은 이민자들의 나라에 좀 더 익숙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미국 사람들은 좀처럼 지역이나 혈통을 가지고 미국의 정체성을 정의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이 자주 들먹이는 것은 “미국은 하나의 관념이다(America is an idea)”라는 말이다. 정치인이나, 언론이나, 유명인들이 잊을 만하면 이 말을 들먹이고, 이것이야말로 다른 나라와는 다른 미국만의 특징인 것처럼 말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작년 현충일에 미국은 하나의 관념이라는 말을 힘주어 강조했다. 그것이야말로 중국과 러시아 같은 다른 강대국과는 구별되는 미국만의 특징인 것처럼.
한국의 인구는 계속 줄어들고 있고, 정부는 엄청난 예산을 들이면서도 그 흐름을 바꾸는 데 꾸준히 실패하고 있다. 한국이 유지되려면 아마도 상당 규모의 이민이 불가피할 것이다. 이제 한국의 정체성을 생각하는 방식을 바꿀 때가 오고 있다. 어쩌면 이미 왔다. 언젠가는 한국 대통령도 말할지 모른다. 한국은 하나의 관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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