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에 깃든 과거[이정향의 오후 3시]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0월 19일 03시 00분


〈56〉 가타부치 스나오 ‘마이 마이 신코 이야기’

이정향 영화감독
이정향 영화감독
1955년, 일본 야마구치현의 시골에 사는 초등학생 말괄량이 신코. 지루할 정도로 보리밭만 펼쳐진 농촌이지만 풍부한 상상력의 신코는 자연을 벗 삼아 심심할 틈이 없다. 할아버지가 집 앞의 수로를 보며 말씀하셨다. “강은 본래 직각으로 굽어지지 않는 법. 아마도 천 년 전에는 여기가 중심지였고, 큰 집이 있었기에 수로를 만드느라 강줄기를 꺾었을 거다.” 신코는 천 년 전에 살았을 사람들을 떠올리며 상상의 나래를 편다. 천 년 전, 이 마을을 다스리던 이에게 실제로 신코 또래의 딸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그 소녀와 소통하고자 천 년을 넘나드는 마음의 편지를 쓴다.

천 년 전, 이곳의 공주는 평민의 친구를 사귀면 안 되기에 언제나 외톨이였다. 아무라도 자기를 찾아오길 기다리다가 지쳐, 천 년 후의 사람들에게 자기를 잊지 말라며 마음의 편지를 보낸다. 기적처럼 그 마음이 천 년 후의 신코에게 가닿고, 둘의 마음이 서로를 보듬고 위로한다. 신코는 자기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의 정성과 사랑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음을 깨닫고, 오늘을 아낌없이 누리면서 내일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이런 신코를 보니 얼마 전 다녀온 서울 종로의 유금와당박물관이 떠올랐다.

유창종 관장은 전직 검사다. 30대에 와당(처마 끝부분을 마감하는 기와)에 반해 40년간 사재를 털어가며 와당 수집에 몰두했다. 증거들을 모아 추론해 가며 사건의 퍼즐을 짜 맞춰 가는 검사의 일처럼 와당의 조각 하나를 두고서 그 시대상을 유추해 보는 작업은, 그에게 만난 적 없는 과거의 사람들과 교감하는 쾌감을 주며 주어진 삶을 의미 있게 살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인생의 길잡이가 되었다고 한다.

태어나기 이전의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공부할수록 우리는 현재의 우리가 얼마나 귀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오래전부터 이곳을 아끼고 다듬어서 물려준 이들의 정성을 깨닫고 감사한 마음으로 둘러보면 내 주변이, 내 일상이 기적처럼 값져 보인다. 그런데, 고백하건대, 학창 시절 공부에 가장 총력을 기울였던 내 고3 성적표에는 국사가 수우미양가 중의 ‘미’, 세계사가 ‘양’이다. 가끔 꺼내 보며 혀를 찬다. 지금부터라도 공부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세상의 구석구석을 아껴야겠다.

‘마이 마이 신코 이야기’는 만화영화이지만 감독은 50여 년 전의 마을을 구현하고자 토박이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자문을 하고, 발품을 팔며 수십 년 전 사진과 물건을 구했다. 만화이기에 넘어갈 수도 있는 오차 범위를 거부하고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의 삶을 진지하게 대했다. 저예산에 소소한 일상을 다룬 영화라 흥행엔 실패했지만 꾸준한 입소문에 힘입어 재개봉까지 한 저력이 있다.

#오늘#깃든 과거#가타부치 스나오#마이 마이 신코 이야기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