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의 부상은 다름 아닌 ‘이념적 인간’의 귀환이다.” 케빈 러드 전 호주 총리는 최근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 기고문 ‘시진핑의 세계관(The World According to Xi Jinping)’에서 이렇게 단언했다. 이 글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머릿속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마르크스주의적 민족주의’가 어떻게 통치이념으로 작동하며 중국 사회 전반을 바꿔놨는지 분석했다.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외교관 출신으로 곧잘 친중(親中) 논란에도 휘말렸던 러드 전 총리다. 시진핑이 지방도시 부시장일 때 처음 만나 교류를 이어왔고 최근엔 옥스퍼드대에서 시진핑 사상을 연구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도 받았다. 누구보다 중국을 잘 안다는 그는 어쩌면 뻔할 수 있지만 흔히 간과돼 온 시진핑의 사고 체계, 그것도 오래전 사멸했다고 여겨진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에 주목했다.
덩샤오핑이 1981년 “이념 논쟁은 집어치우라(不爭論)”라고 일갈한 이래 중국은 비(非)이념의 실용주의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시진핑은 낡은 공산주의 교리를 부활시켜 중국을 통치하는 이념적 토대로 삼았다. 그런 이념은 정치에선 사회 구석구석 공산당의 통제를 강화하는 레닌주의 좌파, 경제에선 국유기업을 되살리고 민간 영역에까지 제한을 가하는 마르크스주의 좌파, 외교에선 공격성을 노골화하는 민족주의 우파 정책으로 나타났다.
시진핑은 역사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에 따라 사회주의 중국의 발전이 자본주의 미국의 쇠퇴를 수반한다며 역사는 중국 편에 있다고 강조한다. 중국의 승리는 필연이고, 그것이야말로 진짜 ‘역사의 종언’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상 아래 공산당은 규율과 교리의 전위대가 됐고, 개혁개방 경제는 국가 통제에 자리를 내줬다. 외교마저 ‘늑대전사’의 무대가 됐다.
향후 시진핑 체제에 대한 러드의 전망은 암울하다. 시진핑은 올해 69세. 그의 어머니는 96세이고 그의 아버지는 89세까지 살았다. 가족의 장수를 감안하면 시진핑은 그 직함이 뭐로 바뀌든 2030년대 후반까지 최고지도자로 남을지 모른다. 러드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중국이 이념적 프리즘으로 국제 정세까지 평가할 위험성이다. 즉 역사는 중국 편이라는 결정론에 입각해 무력 충돌도 불사한다는 무모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평소 러드는 중국 문제라면 빠지지 않는 단골 논객으로 중국의 강압적 행태를 거세게 비판해 왔다. 다만 서방의 거친 공세에 대해서도 “불에 기름을 부어선 안 된다”며 ‘관리된 전략 경쟁’을 제안한다. 외교 경제 이념적으론 치열하게 경쟁하되 군사적으론 명확한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패권국과 도전국 간엔 불가피하다는 ‘예정된 전쟁’에 대응해 러드는 ‘피할 수 있는 전쟁(The Avoidable War)’이란 책도 냈다.
하지만 미중은 충돌 쪽으로 한 발 더 나가고 있다. 지난주 미국 백악관은 ‘국가안보전략’ 보고서를 통해 “탈냉전의 시대는 확실히 끝났다”고 선언했다. 신냉전 개시, 봉쇄전략 가동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군사 경제 기술 전 분야에 걸친 전략경쟁은 이미 한창 진행 중이다. 그 모든 격전지에서 결코 피할 수 없는 대결이 이념전쟁이다.
전방위 대결에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세계적 공급망 분리는 당장 한국에도 탈(脫)중국시장을 강요하고 있다. 이젠 출혈을 최소화하는 출구 전략도 강구할 때다. 사실 한중 이념전쟁은 오래전에 시작됐다. 6·25전쟁을 두고 “항미원조의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했던 시진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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