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취임 44일 만인 그제 사임했다. 영국 역사상 최단명 총리 기록이다. 그는 문제가 된 감세안을 한 달여 만에 전격 철회하고 재무장관을 경질하며 수습에 나섰으나 끝내 여론의 사임 압박을 버티지 못했다. 마거릿 대처 전 총리 같은 위기 대응 리더십을 표방해 온 40대 여성 총리의 굴욕적 퇴장이다.
사임을 촉발한 감세안의 파장은 영국은 물론이고 유럽 등 글로벌 금융시장 전체를 흔들 정도로 거셌다. 파운드화 가치가 폭락하고 국채 금리가 급등하면서 영국발 금융위기설까지 불거졌다. 영국 중앙은행(BOE)이 하루 최대 100억 파운드가 넘는 규모의 긴급 국채 매입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까지 문제 삼고 나선 엇박자 재정, 통화정책으로 영국의 국가 신뢰도는 땅에 떨어진 상태다.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트러스 전 총리의 책임이 무겁다.
‘트러스노믹스’로 불리는 감세안은 근래 영국 최악의 포퓰리즘 정책 실패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트러스 전 총리는 인플레이션 악화로 물가가 치솟는데도 납세자 부담을 줄여주겠다며 72조 원 규모의 감세안을 밀어붙였다. ‘대처 따라 하기’에 급급했을 뿐 달라진 시장 상황과 타이밍 변수는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 감세로 줄어들 재원 마련책도 없었다. 의료, 복지 재정 확대 등으로 불어난 영국 국가채무비율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100%에 육박하는 상황이다. ‘재정이 거덜 나는 게 아니냐’는 공포 속에 발작 수준의 거부 반응이 나타난 것은 필연적 결과였다.
이번 영국 사태는 국내외 경제 흐름과 충돌하는 정책을 독단적으로 밀어붙이면 반드시 역풍을 맞게 된다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 준다. 재정 건전성 유지의 중요성 또한 되새겨야 할 대목이다. 특히 한국은 국가채무가 35개 주요국 중 가장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나라다. 이런 문제점을 외면한 채 여야가 선심성 퍼주기 정책을 지속했다간 정책 헛발질로 인한 타격 여파가 영국만큼 커지지 말라는 법이 없다. 반면교사 삼아야 할 영국의 실정(失政)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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