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하던 언니가 있었다. 똑똑하고 상냥한 데다 패션 센스까지 갖춘 K는 이른 20대 내 선망의 대상이었다. 시간이 흘러 어엿한 직장인이 된 그는 맛있는 밥을 사주겠다며 신촌의 한 파스타집으로 나를 불렀다. “회사에 출근하면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도대체 뭘 하는 거예요?” 진심으로 그런 게 궁금하던 시절이었다. K는 귀엽다는 듯 입사 6개월 차의 내공을 마구 뽐냈고, 나는 먹는 둥 마는 둥 눈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였다.
대화 말미에 K가 사회인의 표정으로 덧붙였다. “자아실현은 회사에서 하는 게 아니야. 회사에서 번 돈으로 회사 밖에서 하는 거지.” ‘아∼’ 하고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자아실현의 거의 유일한 방편으로 직종을, 회사를, 직무를 고민하던 시절이었다. 열심히 읽고 있던 책의 허무주의적 결말을 스포 당한 기분, 은밀하고 어두운 세상의 단면을 준비 없이 알게 된 기분이었다. 그것이 정답이고 사회생활의 진리 명제인 줄로만 알았다.
이후 10년, 이는 다른 듯 비슷한 표현들로 반복 강화되었다. “밥벌이가 다 그렇지 뭐.” “회사 다 똑같아.” 염세와 회의는 힘이 셌고 대체로 무리의 분위기를 지배했다. 반대를 말하는 사람은 애초부터 나와는 다른 존재이거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경우였다. 회사 탕비실에서, 메신저 대화방에서, 사회생활의 덧없음은 입에서 입을 타고 대물림되었다. 이제 와 돌아보니 그때 K의 표정과 말도 필시 선배 중 누군가의 것을 물려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일과 중 반 이상이 수단으로만 존재하는 죽은 시간이라면 나는 도무지 행복할 자신이 없다. 밥벌이를 좋아하고 싶다. 바꿔 말하면 좋아할 수 있는 곳에서 좋아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아무리 ‘밥벌이가 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조금 덜 비관적이고 싶고 조금 더 자아실현에 가까운 일을 하고 싶다. 물론 세상에 완벽한 직장, 완벽한 일은 없기에, 나의 이력은 더 나은 단점, 가장 합이 맞는 단점을 찾아오는 여정이었다. 어쩌면 최근의 높은 이직률도 이렇듯 더 사랑하고 싶은 마음의 발로는 아닐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과거 한 상사가 사내 문화 개선 요구를 묵살하며 덧붙인 말인데, 당시에는 분했지만 냉정하게 짚어 보건대 틀린 말도 아니다. 절이 ‘너무’ 싫은 중은 떠난다. 나 역시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만, 머무는 동안에는 치열하게 좋아해 보고 싶다. 염세와 회의 뒤에 숨지 않고, 변화하거나 변화시키면서 마음을 쏟아 보고 싶다. 그것이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성장의 동력이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사회생활이란 어떤 것이냐고 물어오는 후배에게 말해주고 싶다. 밥벌이는 결코 다 같지 않다고. 물론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기준은 천차만별이니 자아실현이 꼭 그 척도가 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다 똑같다’는 말로 변화로부터 도망가지는 말자고. 그것이 ‘파랑새’를 쫓는 또 다른 도망의 변명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뭐가 됐든 만족스럽지 않다면 변화가 필요하다. 그게 일터이든 나 자신이든. 그것만이 지금껏 내가 찾은 유일한 명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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