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용]‘쌀값 진통제’ 비용은 소비자 몫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1월 2일 03시 00분


핵심 비켜간 양곡관리법 개정 논쟁
쌀 초과생산 해결부터 머리 맞대야

박용 부국장
박용 부국장
고물가시대에도 내리는 게 있다. 9월 소비자물가가 5.6% 올랐는데, 쌀값은 17.8% 떨어졌다. 지난해 풍년이 든 데다 올해도 25만 t의 쌀이 초과 생산될 것으로 예상된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낙엽처럼 떨어질 쌀값 걱정에 농민들의 시름이 깊다.

한국 쌀 시장은 만성적 공급과잉 상태다. 소비가 빠르게 줄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떠나는 위태로운 시장에서 쌀값을 지탱하는 건 정부다. 쌀이 과잉 생산되면 양곡관리법 기준(초과 생산량 3% 이상이거나 쌀값 평년 대비 5% 이상 하락)에 따라 세금으로 남아도는 쌀을 사들이는 ‘시장 격리’(정부 매입)를 한다. 정부는 기준을 충족한 11번 중 2006년을 빼고 10번 시장 격리를 했다.

올해도 식량 안보를 위한 공공비축미 45만 t에 더해 역대 최대 규모인 45만 t의 쌀을 시장 격리한다. 총 쌀 생산량의 약 4분의 1이 시장에 풀리지 않고 정부 양곡 창고로 직행하는 셈이다. 정부 발표 이후 10월 5일 기준 쌀 산지 가격이 9월 25일 대비 16.9% 올랐다. 초과 생산을 해결하지 못하니 세금으로 쌀값 하락 고통을 덜어주는 ‘진통제’만 놔준 셈이다.

정작 생산을 줄이거나 신규 시장을 발굴해 쌀 공급 과잉을 해결하는 구조개혁은 더디다. 1인당 쌀 소비량은 지난 10년간 평균 2.2% 줄었는데 쌀 생산량은 0.7% 감소하는 데 그쳤다. 안타깝게도 더불어민주당이 밀어붙이고 있는 양곡관리법 개정안 논쟁은 이런 근본 해법과는 거리가 멀다. ‘시장 격리 진통제’를 의사(정부)가 재량으로 놓게 하느냐, 조건만 충족하면 자동으로 놓게 하느냐를 두고 여야가 각을 세우고 있다.

야당은 지난해 정부 대응이 늦어 쌀값 급락을 미리 막지 못했다며 이참에 정부 재량권을 없애고 법이 정한 기준에 부합하면 자동으로 쌀 초과 생산량을 시장 격리하게 의무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와 여당은 그렇게 하면 쌀 공급 과잉 구조를 해결하지 못하고 2030년까지 연평균 1조 원의 시장 격리 비용이 들어간다며 반대하고 있다.

야당 주장처럼 시장 격리를 의무화하면 쌀값이 급락해도 농가 소득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정부가 끌어올린 쌀값 부담은 국민들의 몫이다. 소비자들은 쌀값 안정에 들어가는 세금도 내고 비싼 쌀값까지 감수하는 ‘이중 부담’을 져야 한다. 흉년이 들어 쌀값이 크게 뛰어도 다음 해 풍년이 들어 초과 생산이 발생하면 정부가 자동으로 쌀을 매입해야 하기 때문에 시장에서 쌀값이 떨어지지 않거나 더 오르는 황당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야당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포함된 쌀 생산 조정 방안(논에 벼가 아닌 다른 작물을 재배하면 지원)이 실행되면 시장 격리 비용이 줄 것이라고 반박한다. 하지만 정부가 쌀값을 지탱해 주는데 판로도 불확실하고 소득도 적은 다른 작물을 재배할 농민이 얼마나 될까. 농촌경제연구원은 시장 격리를 의무화하면 쌀 초과 생산량이 올해 25만 t에서 2030년 64만 t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시장 격리 의무화가 오히려 생산 조정을 방해해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 농가의 절반이 쌀농사를 짓고 농업 소득의 32.9%는 쌀에서 나온다. 국가부채가 빠르게 늘고 있는 상황에서 재정으로 무한정 쌀값을 지탱할 순 없다. 언젠가 정부가 ‘산소호흡기’를 갑자기 떼면 쌀 농가가 받을 충격은 상상하기 어렵다. 농가의 미래와 소비자에게 모두 보탬이 되는 일은 논 재배 작물을 다각화하고 만성적 쌀 공급 과잉을 해결하는 구조개혁이다. ‘쌀값 진통제’ 논쟁으로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다.

#쌀값 진통제#비용#소비자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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