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퇴진을 주장하는 ‘촛불행동’이 5일 서울 광화문 ‘이태원 참사 추모 촛불집회’를 준비 중이다. 촛불행동은 ‘조국백서’를 집필한 교수와 야당의 비례위성정당 대표를 지낸 인사가 주도하는 시민단체다. 지금까지 12차례 정치 집회를 가졌는데 이번엔 이태원 참사를 계기로 추가 집회를 예고한 것이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가 일어난 지난달 29일 오후 5시 촛불행동은 광화문에서 집회를 열고 대통령실이 있는 삼각지역까지 행진한 후 오후 8시 넘어 해산했다. 전광훈 목사가 대표인 자유통일당은 그날 오후 3시 광화문 일대에서 ‘주사파 척결 국민대회’를 열었다. 양대 노총 집회와 4·15 부정선거 규탄대회, 박근혜 대통령 탄핵 무효 집회, 반미 집회까지 이날 도심에서 열린 집회가 16개다. 6만 명이 운집했고 경찰 4000명이 동원됐다. 같은 날 13만 명이 모인 이태원 일대 경찰 인력은 137명이었다. 집회 참가자 15명당 경찰 1명, 이태원은 시민 950명당 경찰 1명꼴이다. 정치 집회엔 민감하고 시민 안전엔 둔감한 것이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이태원 참사 대응 부실을 질타하는 지적에 “시내 곳곳에서 시위가 있어 경찰 경비 병력의 상당수가 광화문 등으로 분산됐다”고 했다. 참사의 책임을 집회에 전가하는 듯한 부적절한 해명이다. 하지만 매주 대규모 정치 집회로 세 대결을 벌여온 이들이라면 경찰 역량을 소진시켜 이번 참사에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아닌지 조용히 돌아봐야 하지 않나.
최근 광화문 일대에서 맞붙는 시위는 언제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상대 진영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하다. 민주주의는 원래 시끄러운 것이지만 관리되지 않는 갈등은 위험하다. 한국은 정치 경제 사회 분야 갈등 수준이 경제협력개발기구 30개국 중 3위인데 갈등 관리 능력은 27위로 바닥권이다(전국경제인연합회). ‘유익하게 싸우는 정치’는 할 줄 모르고 ‘유해하게 갈등하는 정치’에만 능한 것이다. 임기가 4년 반 남은 대통령 퇴진을 바라거나 4·15 부정선거를 믿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데도 여야 정치권은 ‘열정적 소수 지지자’들을 말리기는커녕 이들 행사에 얼굴을 내밀며 갈등을 키운다. 박상훈 정치학 박사의 표현을 빌리면 “서로 마주 보고 문제를 풀어가는 게 아니라 뒤돌아 자신의 지지자들을 향해 아첨하는 정치” 탓에 “정치도 사회도 양극화되고 안전한 시민의 삶은 멀어지고 있다”.
이번 사태에서 보여준 정부의 역량은 참담한 수준이다. 참사 사흘 전 상인 단체가 “압사사고 위험”을 경고했고 참사 4시간 전부터 “압사당할 것 같다”는 잇단 신고가 접수됐다. 모두 흘려들었다니 기가 막힌다. 그래도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오려면 정부의 무능과 부실 대응에 책임을 묻는 선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세월호 참사 후 ‘생명우선 안전사회’를 한목소리로 약속했던 정치권은 8년간 뭘 했나. 주최 측이 없는 행사 대응 매뉴얼의 필요성을 인지하고도 7년간 만들지 않은 이유는 뭔가. 이태원 좁은 골목길에 죽음의 병목 현상을 초래한 불법 건축물을 방치해둘 수밖에 없었나. 이태원 말고 다른 곳은 안전한가.
전쟁이나 테러가 난 것도 아닌데 어제 나간 자식이 오늘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14개국 26명의 외국 젊은이가 서울 한복판에서 깔려 죽었다. 마주 보고 차분하게 이태원의 비극이 제기하는 질문들에 답을 찾아나가야 한다. 유익하게 싸우기보다 유해하게 갈등하는 실패한 정치로는 또 어떤 희생을 대가로 치러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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