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본디 이기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타이태닉호 침몰이나 9·11테러와 같은 재난을 연구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르다. 사람들은 배가 가라앉고 빌딩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약자들을 보호하며 의연하게 대처했다. 위기의 순간 이기심에 지배당하지 않고 서로 돕는 이타적 본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재난이 닥치면 등장하는 ‘의인’들이 그 증거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때도 목숨 건 의인들이 있었다. 친구에게 구명조끼를 벗어준 고교생, 마지막까지 제자들의 탈출을 도운 교사, “승객들 먼저”라며 끝까지 배에 남은 승무원들이다. 2020년 경기 군포 아파트 화재 때는 ‘사다리차 의인’이 주민들을 살렸다. 2016년 서울 서교동 원룸 건물 화재 땐 ‘초인종 의인’이 집집이 초인종을 눌러 대피시키느라 자신은 빠져나오지 못했다. 2017년 경북 군위군에 사는 스리랑카 남성은 불난 집에 뛰어 들어가 할머니를 구해냈다. “평소 마을 어르신들이 따뜻하게 보살펴 준 게 고마워서”라고 했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가 발생한 죽음의 골목길에서도 외국인들이 귀한 목숨을 살렸다. 골목길엔 대피할 수 있는 건물 난간이 있는데 청재킷을 입은 남성이 “밟고 올라가라”며 어깨를 내주고 가죽재킷을 입은 남성이 도와준 덕분에 여럿이 난간으로 올라가 살았다. 덩치 좋은 흑인 남성이 동료 2명과 나타나 인파에 깔린 사람 30여 명을 ‘밭에서 무 뽑듯’ 빼냈다는 목격담도 나왔다. 이들은 경기 동두천시 캠프 케이시에 근무하는 미군들로 밝혀졌다.
▷경찰의 부실 대응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참사 현장에서 고군분투한 경찰관에겐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이태원파출소 소속 김백겸 경사(31)다. 김 경사는 단순 시비 신고를 받고 동료들과 출동했다가 참사 현장을 발견한 뒤 “사람이 죽고 있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하고 외치며 인파를 통제하고 구조 작업을 지휘했다. 그는 “시민들이 경찰관보다 먼저 구조 활동을 펼치고 있었고, 남녀 가리지 않고 모두가 달려 나와 환자들을 둘러업고 이송했다”며 “더 살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뿐”이라고 했다.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는 말이 있다. 공감하고 연대하는 힘은 지구상에 존재했던 99.9%의 종이 멸종하는 동안 뇌도 덩치도 네안데르탈인보다 작은 인류가 살아남은 비결이다. 이타심은 전염된다. 군포 ‘사다리차 의인’은 예전에 어느 사다리차 기사의 구조담을 듣고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나도 그렇게 해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이태원 의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크고 작은 재난이 닥쳤을 때 또 다른 의인이 되어 손을 내밀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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